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허은실 시인 / 삼 척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4.

허은실 시인 / 삼 척

 

 

칼을 갖고 싶었지

 

고등어처럼

푸르게 빛나는

 

칼이 내 몸에 들어와

찔린 옆구리로 당신을 낳았지

 

바다가 온다

흰 날을 빛내며

 

칼이 온다

 

 


 

 

허은실 시인 / 바람이 부네, 누가 이름을 부르네

 

 

입안 가득 손톱이 차올라

뱉어내도 비워지지 않네

문을 긁다 빠진 손톱들

더러는 얼굴에 묻어 떨어지지 않네

 

숲은 수런수런 소문을 기르네

바람은 뼈마디를 건너

몸속에 신전을 짓고

바람에선 쇠맛이 나

 

어찌 오셨는지요 아흐레 아침

손금이 아파요

누가 여기다 슬픔을 슬어놓고 갔나요

내 혀가 말을 꾸미고 있어요

 

괜찮다 아가, 다시는

태어나지 말거라

 

서 있는 것들은 그림자를 기르네

사이를 껴안은 벽들이 우네

울음을 건너온 몸은

서늘하여 평안하네

 

바람이 부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네

몸을 벗었으니 옷을 지어야지

 

 


 

 

허은실 시인 / 푸른 손아귀

 

 

플라스틱 슬리퍼 한 짝이 맨드라미 옆에서 말라갔다.

어른들은 사내애를 건져놓고 담배를 피웠다. 비가 많은 해였다.

 

사람 잡아먹는 산이라 했다. 비스듬히 빠진 두 골이 만나는 자리. 가뭄에도 물을 강에 안겼다. 강은 소용돌이와 모래 구덩이를 감추었다. 저녁 물소리마다 우렁이 굵었다.

 

고요해진 물 위에 나는 벗은 몸을 비춰보았다.

사나 여럿 후릴 상이라 했다.

몸이 불은 강물 위로 물고기들이 튀어올랐다.

 

비가 많은 해다. 무당은 자꾸 물이 보인다 했다. 아버지는 산에서 발견됐는걸요. 바위를 덮은 이끼가 젖었다.

강물과 산이 푸른 웃음을 주고받는다. 만삭의 배를 감싸며 나도 씨익, 웃어주었다.

 

아기는 뱃속에서 육십 년쯤 살고 나온 얼굴이다. 삼우제였다.

 

청벽산은 푸르다.

 

고요한 수면 아래

흰 발목을 잡아채는 푸른 손아귀가 있다.

 

 


 

 

허은실 시인 / 저녁의 호명

 

 

제 식구를 부르는 새들

부리가 숲을 들어올린다

 

저녁빛 속을 떠도는 허밍

다녀왔니

뒷목에 와 닿는 숨결

돌아보면

다시 너는 없고

주저앉아 뼈를 추리는 사람처럼

나는 획을 모은다

 

어디로 가는가 무엇이 되는가

속으로만 부르는 것들은

 

네 이름이 내 심장을 죄어온다

 

소풍이라 말하려 했는데

슬픔이 와 있다

 

도요라든가 저어라든가

새들도 떠난 물가에서

나는 부른다

검은 물 어둠에다 대고

이름을 부른다

 

돌멩이처럼 날아오는

내 이름을 내가 맞고서

엎드려 간다 가마

묻는다

묻지 못한다

 

쭈그리고 앉아

마른세수를 하는 사람아

지난 계절 조그맣게 울던

풀벌레들은 어디로 갔는가

거미줄에 빛나던 물방울들

물방울에 맺혔던 얼굴들은

 

바다는 다시 저물어

저녁에는

이름을 부른다

 

 


 

허은실 시인

1975년 강원도 홍천 출생. 서울시립대학교 국문과 졸업. 2010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라디오 오락·시사 프로그램의 작가로 10년 넘게 활동. 현재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작가.2018.02. 제8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