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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모 시인 / 불꽃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3.

이정모 시인 / 불꽃

 

 

수천 마리의 나비 떼

 

줄지어 날아오르다가 내려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른다

 

봄을 알고 싶어

스스로 꽃도 되고

 

사랑을 느끼고 싶어

혼자 붉은 입술도 되어보다가

 

그러다가 끝내

꽃 지고 사랑은 떠났을터,

 

그러나 슬픔이여!

 

그게 어디냐고 되뇌지 말고

 

다만,

불씨로 건드려만 봐라

 

지금은 어떤지

몸짓으로 보여 주겠다

 

 


 

 

이정모 시인 / 시코쿠를 떠나며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고 나온 것처럼

어디서 본 듯한 집들이 흘러가고

물 위를, 바다 위를, 한낮의 햇살 속을 기차는 간다

이름도 모르는 역이 풍경도 생경한 마을로 안내하고

연기처럼 몽실한 사연들이 옹기종기 모여 손을 흔든다

내가 바라는 건 아니지만 간격은 멀어지고

차장은 차표를 보자 하고

인사는 차표와 함께 내게 남아 있다.

표가 있다 한들 떠나는 길

뜨거운 여로에 가슴 메는 순간

선로는 발을 구르지만 눈꺼풀 속으로 자꾸 무너진다

헤어지기 좋은 시간도 아니고

하찮은 영혼은 하나도 없으나 몸은 무심하게 놓친다

내가 다 쓰고 만 시간들이 멀어져

방목에 감염되고 있는 중이다

두고 온 닭 소리와 함께 마음도 풀어놓고 왔는데

기차는 울다 그쳤는지 간혹 떨면서 간다

나는 그녀의 애인이 되고 싶은데

고도는 속한 적이 없다고 나를 버리고 간다

 

 


 

 

이정모 시인 / 햇살 공양

 

 

가을 산이 자꾸 묽어지고 있다

올라야 할 허공은 더 이상 설레지 않고

바람을 타고 일어서려다 금세 무너지는 낙엽

 

이젠 아무도 이름 부르지 않는 영혼이

허공의 손끝을 벗어나

출렁,

다음 생에 내려앉는다

 

보이지 않는 공중의 손이

제 생명으로 다리를 놓는 것인지

묻지 않으니 바람도 묻지를 않는데

 

누가 퍼붓는지 모르면서

왜 나는 노란 평화를 햇살 공양 받으며

가난한 산의 말을 줍고 있는가

 

더 이상 발기하지 않는 가을 숲은

갈참나무 마지막 도토리를 뱉어내고

 

수많은 전생을 거쳐왔을 11월의 몸은

바람마다 피를 흘리겠지만

 

나는 아무도 걷어 가지 않는 파장의 이 계절을

붉어지는 데 한 생을 다 써버린

장미의 디스토피아에 두고 올 것이다

 

얼마간

나는 간절하지 못한 죄목으로

이 서러움의 서식지에 바쳐질 것이므로

 

 


 

 

이정모 시인 / 은유의 메뉴얼

 

 

시간을 닫은 적막한 빈집

그 눈부신 고요 속에서나

수상한 숨 몰아쉬는 가을의 뒤태가

그렁이는 걸 보면 아시라

보이고 싶은 것은 갇혀있다

 

나무의 침묵을 모르는 생의 가벼움

불쏘시게로 잘게 쪼개어

아궁이에 던져 넣으니

지구의 얼굴에 혈색이 돈다

 

바람과 햇살에 빌려와

애벌레에게 갚았다

계곡을 물들이며 흘러가는

저 붉은 잎의 선명한 행적

조용히 흔들리는 물에서 길을 본다

 

이번 생의 하찮은 날과

견디고 벗을 때를 알고있다

다녀갔다는 흔적 감추지 않고

신비한 언어를 읽으며 간다

 

 


 

 

이정모 시인 / 종이를 자르며

 

 

 

종이의 습성을 가진 슬픔

지난 아픔은 곱게 넣어 봉하지만

때로는 젖은 봉투처럼

찢어지고 싶을 때 있는 것이다

 

곁눈질은 아예 생각지 않고

베인 마음 가득 채우니

가위 소리가 그때부터 흘러넘쳐

눈물을 먼저 보내는 것이다

 

오래전에 놓아버린 구름이

침묵에 기록한 긴 문장

하늘이 된 계단에 문을 달고

그리움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뜨거운 울음을 담금질하다

식은 오늘에야 마음내어

새로 내민 가지에 기억을 올린다

야윈 어제의 놀라움을 닦으려

황망히 종이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정모 시인 / 곡선에 대하여

 

 

직선을 버리고 하늘을 날아 오른다

휘청거리는 목표와 방황을 따라

궤도는 움직이는 미학

너의 아름다움을 뒤 따라간다

 

선은 생명의 결

흐르는 느낌은 살아있다

유연하게 깃발이 펄럭일 때

바람은 지나간 날을 보지 못한다

 

갇혀있는 허공은 몸부림치고

시간은 번득이질 않는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휘어진다

절망을 찾아 떠나는 날개

가벼워지는 걸 두려워 않는다

 

뒤에 남은 절집이

새가 날아간 무늬에 대하여

입 다문다

 

 


 

이정모 시인

1950년 강원도 춘천 출생, 2007년 '심상'으로 등단, 부산작가회 의, 한국문협회원, 시집 <허공의 신발>, <제 몸이 통로다>, <기억의 귀> 외.  땅끝 백련재문학의 집에 서 창작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