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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길상 시인 / 유턴 지점의 세탁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4.

이길상 시인 / 유턴 지점의 세탁소

 

 

십 년 전에도 그들의 집은 세탁소였다

세탁소는 지루한 그림 속에 있었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들

무기력한 일상이 옷 밑단 속에 햇살로 꿰매졌다

 

퇴근 후에도 뭔가를 찾는 사람들

그의 옆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신발장 속의 때늦은 포부가 하루하루 지친 그의 그림에 자주 올라왔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폐쇄된 회로 같았다

마음이 분주히 움직였으므로

정작 그리고 싶었던 게 찾아왔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림 속엔 불어터진 시간만 쟁여졌다

너덜거리는 시선으로 달빛이 스몄다

빈 주머니에서 담배가 만져졌고

다림질만 해도 삶의 속도는 항상 제자리였다

 

찾아가질 않는 옷들이 있어 겨울이 왔다

아내는 입지 않을 옷들을 마구 사들였다

그녀는 가벼운 색 옷만으로도 환멸 덩어리가 되었다

자신을 이해한 순간 그와 아내는 벼랑의 끝

쇼핑 후 미친 듯한 과속으로 그녀는 죽었다

 

거리의 때절은 죄들, 세탁기에서 풀어질 때

난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그들이 꿈꾸는 세탁소는 다시 지루한 그림 속이리라

바람 없이도 시간을 허비하며 흔들리는 불꽃

램프 안 휘청이는 불꽃은 브레이크가 없다

 

 


 

 

이길상 시인 / 오늘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회사가 돌연 사라졌다

중국집의 어색한 클래식 음악이 더 멀어보일 때

백화점 앞에 황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물러나면서 벽을 만드는 사람들

벽은 망원경이다

밤까지 소문이 사람들 가슴속에 머물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만이 새벽까지 환하게 켜졌다

서울에서 웃는 항복은 새로운 음모다

순정한 것들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을 때

내 옆의 사람들도 자신이 사라졌다는 걸 알까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건 스스로 깨져

밝아지는 변기의 물

그 사실을 안 내가 사라졌으므로 서울은 완벽하게 정상이다

경계가 지켜주는 이 평온

우린 잘 알고 있기에 모를 수밖에 없다

주위 사람들이 증명해주지 않으면 사라지는

내 존재의 불안

사막은 가깝기에 멀다

음악, 책, 사람들이 한줌 모래여서 모래로 느껴지지 않는다

교양센터를 나온 발자국들

하필 오토바이와 함께 신호등을 건너는 걸까

가장 아득한 날도 평범한 거리일 거다

오늘은 가슴속 깊이만큼 살아 있을 테니

사람들. 백화점 밖 허공의 세상을 건너갔다

시간은 갑자기 흘러간다

 

 


 

 

이길상 시인 / 백지 날리는 길 위에서

 

 

공터의 새들마져

점자 같은 세상을 읽고 날마간 밤

마무도 없는 머룬 도로 위로

백지가 날아다녔다

 

고요한 저 길 위에 분명 행복한 사내가 죽어 있었으리라

사내는 죽어가면서도

단아하게 삶을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길 위에서도 편안하게 누울 수 있었을 테니

그는 유서를 쓸 필요가 없었다

그때 손에서 빠져나가는 백지

 

가슴 안까지 곪아 더 이상 찢길 게 없기에

행복의 빛이 새어나왔을까

삶이란 죽음으로 맑게 깨어 있기도 하므로

마지막 동전 몇 개로 때우는 라면에

가족의 얼굴들이 딸려 올라왔다

 

사라지는 사람들은 항상 비장했고

제 안에 길을 만들었을 그

쪽방 세숫대야의 꽃잎, 배불리 달빛 두드렸다

 

백지가 날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길은 사람들 잠 속까지 깨어 있겠고

밤, 말씀이 써진 백지가

불빛들을 지우며 길을 찾고 있었다

 

 


 

 

이길상 시인 / 벌레는 거미줄에서 웃는다

 

 

거미줄의 거미는 자신이 거미인 줄 모른다

거미라는 이름의 벌레가 그물에서 굳어갈 뿐

스타 학생이 학생들 관심 밖에서 거미줄을 탄다

벼랑이 있어 공중의 길은 더 안전하다

 

스타는 건조하게 나부끼는 몸을 더 펼친다

교실 안은 이미 그물이다

미소만큼 완벽한 가면은 없다

스타가 외톨이를 위해 친구들에게 미끼를 놓는다

안전할수록 안전망의 경계는 제 몸을 가린다

가면을 벗은 표정은 더욱 변형된다

가까우면 춥고 너무 멀면 다 타버린다

역의 역을 치는 가면의 진짜 얼굴

상처 되지 않는 거리가 뼈아프다

 

미끼 밖의 미끼

외톨이에게만 친구들이 다가온다

홀로 된 스타

가면들을 벗는 순간 가면의 체온을 유지된다

몽우리 잡힌 마음이 화사하게 핀다

혼신의 힘으로 녹아내려야 하는 자신의 길

 

거미줄 아래 벼랑마져도 삶이다

유명인의 광고탑 불빛이 멀어질수록 더 가깝게 보인다

공중의 길은 위험한 만큼 바로 광고탑에 닿는다

거미는 공중의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다

가까우면 춥고 너무 멀면 다 타버린다

 

 


 

 

이길상 시인 / 살아 있는 훨체어

 

 

그 집은 건장한 사내가 주인이다

방엔 수백 켤레의 구두가 놓여 있었다

휠체어가 구석에 박혀 먼지 뒤집어쓸수록

구두는 늘어갔다

사내의 구두들은 극적인 행운을 꿈꾸는 시간이다

 

다리가 나은 후부터 사내는

오히려 휠체어를 탄 게 아닐까

자신의 상처가 빨리 나았다고 생각되는 순간

휠체어 신세가 된 거다

휠체어 속에서 놓친 행복이 홀로 익어갔다

자신의 발에 맞는 마름다운 구두는 없을 거다

 

역驛에서 구두 한 짝 잃어버렸다는 사내

새벽까지 그것을 찾아 헤맬 때

구두가 아니라

병든 삶 속을 헤매는 게 아닐까

정신 말짱하게 취해가는 그

제 안의 욕망을 건너가고 있었으리라

건장한 사내, 자꾸 주저앉았다

죽은 생이 신발을 쭉 신어본다

 

 


 

이길상 시인

1972년 전주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와 同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200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및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