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우 시인 / 멍
한 알의 사과는 냉장고 속에서 아주 잠깐씩만 빛으로 풀려나오다 다시 어둠에 갇히며 썩어버렸다
아니, 그 전부터 사과는 더 이상 사과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을 것 그래서 사과는 냉장고 속 어둠보다도 어두운 사과를 알고 있었을 것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너를 떠났고
꿈에 복수(腹水)가 가득 찰수록 웃음이 점점 얇아지고 먹지 않아도 배가 터질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낸다 더 썩을까봐 먹으려던 사과를 누군가 이미 먹고 있다
사과의 밀봉을 뚫고 흘러나오는 사과의 피 묻은 얼굴
벽시계 옆, 뚫린 창밖으로 이름 모를 새가 초침소리를 내며 지구를 찢고 있었고 너는 나를 떠나지 않았으므로
밤이 온다
최현우 시인 / Knocking a grave
두드릴까 누를까 목련이 떨어지는데
함께 걸을 때 따라가야 하는 사람과 뒤를 돌아봐야 하는 사람 그 사이에 있는 너와는 꽃비를 맞아도 슬프지 않았다
내가 나보다 크게 부풀면 언제든지 달려가 벨을 눌렀고 맨발로 나와 안아주었으므로 안아서 나를 다시 줄여주었으므로 문이 벽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벨이 망가졌다 너의 집이 두꺼워졌다 혼자 돌아서는 길에 대문 옆 엎드려 있는 그림자 아직도 너의 어깨가 눈에 묻어있는 건지 착각이 혼자 그 자리에 붙어있는 건지
두드릴까 누를까 아니면 그냥 기다려야 할까
두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드릴 때는 놓고 싶지 않은 듯이 주먹을 쥐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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