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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예명이 시인 / 클렌징크림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4.

예명이 시인 / 클렌징크림

 

 

불빛이 스며든다. 블라인드를 내린다. 어둠이 액체라면 바닥까지 짜, 바닥을 펴, 바닥이 투명한 밤으로, 밤의 감정은 희고 매끄러울 것 같다. 느낌의 후면처럼 전혀 다르지만, 같은. 밤의 감정이 남아있다 해도, 아침이면 블라인드를 올린다. 손이 올린 블라인드, 블라인드가 올린 밖, 모닝커피가 조용조용 무늬를 퍼뜨린다. 희고 고운 끈적임을.

 

결이 난 그것은 표면도 내부도 조용조용. 조용함이 무질서해질까, 무질서를 가장한 지극히 극한 부드러움으로. 어쩌면, 밤은 어둠을 흡수하기 전에 아침을 코팅해놓고 최대한 탄력 있게 그것을 펴 바르듯.

 

밤의 징후는 불빛, 그것의 징후는 눈빛, 불안이 내공인 몽타주처럼 흘러내릴 듯 흘러내릴 듯, 부드러워.

 

그것이, 그것이 아니었을 때, 눈과 눈이 바른 클렌징.

이젠, 마음이 살지 않는 방으로 변명을 바르는데,

상처에 바르는 연고는 크림 키스처럼 스며,

힘들어도 눈물은 조심해야 해. 눈물 끝은 진하니까.

 

용서를 바른다. 용서가 가렵다.

 

그것이 만든 클렌징크림은 가짜였다.

 

 


 

 

예명이 시인 / 食

 

 

아담과 이브가 즐겼다지

무화과처럼 무량했다지

사랑이 먼저

빵이 먼저

피 흘림은 배고픔에서 시작된 것

어둠도 배고픔에서 시작된 것

 

연결해

살점이 돋듯

욕구를 발기하게 해

食이 뻗칠 때

아담과 이브처럼 단순하게

항문처럼 신랄하게

입을 디민다

하지만 먹는 것이 막히면 어두워지지

기본이 무너지지

입이 닫힌다는 것은

욕구가 사라지는 것

물 한 모금 닿지 않는 것

검은 꽃이 파먹는

고깃덩어리,

 

 


 

 

예명이 시인 / 날개

 

 

왼발 오른발 모호할 때

슬픔이 디뎠는지 기쁨이 디뎠는지

슬픔과 기쁨이 엉켰는지

아무도 없는 너무도 많은

발을 쫓는 것은 검은 발

두 발이 끌리면

벽을 밟은 것

 

층층 쌓은

디딜 때마다 살아

 

하지만

두 발이 동시에 멈출 때

가지런히 뻗을 때

벽은 사라지고

한 생의 족적이 펴지는

 

계단

 

 


 

 

예명이 시인 / 무대

 

 

오늘 아침은 동작이 느린 말 같다

몇몇 운동복이 자음으로 모음으로

공원이 양팔을 비비며 나와 걷는다

아직은

앞트임이 좁은 봄처럼 쌀랑하다

 

시간의 센서로 켜지는 조명

간혹 계절을 잃은 꽃처럼 흔들리기도

 

장막이 걷히듯 무대가 밝아진다

 

움직인다. 각기 다른 주인공으로

치열하게 혹은 헐렁하게

이렇게 공원과 매치된 나를

책으로 옮기면

독무대

 

문장의 고리를 찾아

허방을 조명하듯

즐거운 울렁증

풀샷

 

 


 

예명이 시인

경기도 부천에서 출생. 본명: 이명예. 2013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서정의 내부』(시인동네, 2014)가 있음. 2010년 수주문학상 우수상 수상. 시흥문인협회 이사. 시향문학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