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현우 시인 / 멍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4.

최현우 시인 / 멍

 

 

  한 알의 사과는 냉장고 속에서

  아주 잠깐씩만 빛으로 풀려나오다

  다시 어둠에 갇히며 썩어버렸다

 

  아니, 그 전부터 사과는

  더 이상 사과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을 것

  그래서 사과는 냉장고 속 어둠보다도

  어두운 사과를 알고 있었을 것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너를 떠났고

 

  꿈에 복수(腹水)가 가득 찰수록

  웃음이 점점 얇아지고

  먹지 않아도 배가 터질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낸다

  더 썩을까봐 먹으려던 사과를

  누군가 이미 먹고 있다

 

  사과의 밀봉을 뚫고 흘러나오는

  사과의 피 묻은 얼굴

 

  벽시계 옆, 뚫린 창밖으로

  이름 모를 새가 초침소리를 내며

  지구를 찢고 있었고

  너는 나를 떠나지 않았으므로

 

  밤이 온다

 

 


 

 

최현우 시인 / Knocking a grave

 

 

두드릴까

누를까

목련이 떨어지는데

 

함께 걸을 때

따라가야 하는 사람과

뒤를 돌아봐야 하는 사람

그 사이에 있는 너와는

꽃비를 맞아도 슬프지 않았다

 

내가 나보다 크게 부풀면

언제든지 달려가 벨을 눌렀고

맨발로 나와 안아주었으므로

안아서 나를 다시 줄여주었으므로

문이 벽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벨이 망가졌다

너의 집이 두꺼워졌다

혼자 돌아서는 길에 대문 옆

엎드려 있는 그림자

아직도 너의 어깨가 눈에 묻어있는 건지

착각이 혼자 그 자리에 붙어있는 건지

 

두드릴까

누를까

아니면 그냥

기다려야 할까

 

두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드릴 때는

놓고 싶지 않은 듯이

주먹을 쥐었으므로

 

 


 

최현우 시인

1989년 서울에서 출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발레니나〉가 당선되어 등단.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