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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수진 시인 / 극야(極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5.

장수진 시인 / 극야(極夜)

 

 

신은 밤새도록 악마와 당구를 치고

잘못 맞은 적구가 당구대 밖으로 튀어 오르면

도시에 태양이 뜬다

 

딩...딩...

 

악마는 발가락을 까딱이며 알람을 울리고

두 팔을 길게 뻗어

잠이 덜 깬 자의 발에 구두를 신겨준다

 

우리는 걷고 또 걷고

 

사고팔고 사랑하고 오해하고

 

추락하고 추억하고

 

두 노인네는 낮의 당구장에 죽치고 앉아

끝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악마가 이름을 부르면

누군가 태어났고

신이 그 이름을 까먹으면

누군가 사라졌다

 

그들은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먹은 밥을 먹고 또 먹었다

 

집에 간다며 악수하고 헤어진 신과 악마는

길을 헤매다 우연히 다시 만나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불렀다

 

아침은 오지 않고

쉰내가 풀풀 나는 어둠만

머리 위로 끝없이 쏟아졌다

 

 


 

 

장수진 시인 / 폭우 혹은 사랑

 

 

비 오는 소리가 짜락짜락 나

문 쪼께 열어보니 넘실넘실혀 걍

죽겠어 깐딱하면

 

* 전남 담양 폭우 피해자 진봉덕 님의 인터뷰

 

 


 

 

장수진 시인 / 6백 년 전의 기도

 

 

오후의 공원에서

미지근한 빵을 먹으면 이내 분명해지는 것

 

살아 있다는 화사한 공포

 

분수대 안에서

동전을 던지며 첨벙첨벙 뛰노는 아이들

엄마는 저만치, 할머니는 무덤가에

 

집이 무너지기 전에

고아가 되기 전에

마지막 동전이 떨어지기 전에 잠들면 좋으련만

 

팡파르가 울리네

앳된 병사들은 작은 북을 치며 행진하고

폭격이 오려나 이 도시에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 오늘 죽으려나

아이야 이리 온, 누군가 우릴 위해 기도하고 있단다

 

14세기 이름 없는 섬의 수도원에서

6백 년 후의 후손을 위해 누군가 무릎을 꿇는다

 

소용없군요, 당신의 기도 당신의 무릎

 

오늘 이 언덕의 오래된 선물가게는

훗날 대학살의 시계탑이 될 테고

당신의 수도원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수용소가 되었으니

 

우리는 매일 죽어가며 다른 빵을 찾고

잠깐씩 백치가 되고

어쩔 수 없겠지요, 살아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당신의 후손이 아닙니다

시간은 수직으로 흐르지 않아요

 

나의 침상에서 숨을 거둔 포로는 내게 오늘의 빵을 남겼습니다

 

 


 

장수진 시인

1981년 서울에서 출생. 2008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연기 전공) 졸업. 2006~2010 극단 〈골목길〉단원. 2012년 제12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