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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천 시인 / 묵화墨畵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4.

김혜천 시인 / 묵화墨畵

 

 

적막한 하늘은 지구의 서사를 끌어안고 침묵 중이다

침묵은 더 이상 침묵 할 수 없을 때

노골적으로 몸통을 드러낸다

지구의 구석구석을 살피던 태양이

산 허리를 돌며 깔아 놓은 데크 위에 기형의 명암을 풀어내는 정오

지구는 쓰레기 산에서 고름이 줄줄 흐르고, 바이러스가 얼굴을 바꿔가며 활개를 치고 있구나, 지구인들은 삶과 죽은의 경게가 맞닿아 불안에 떨고 있구나, 숲을 이루어야할 나무의 뼈들이 병들어 비틀리고 말라가며 재앙의 날이 오기도 전 고열로 몸살을 알고 있구나

쪽빛과 초록은 사라지고

검고 숭숭 구멍난 목덜미만 앙상한 나무의 초상

뒤틀리고 벌레먹은 그늘의 의미를 받아 적을 수 있다면

데칼코마니로 저 눈물을 찍어낼 수 있다면

내 안에 흐르는

몇 광년의 청정한 거리로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 내는 접속의 시간

따가운 파열음이 고요를 흔들고

뿌리는 한 뼘 더 어둠 속으로 깊어진다

 

계간 『시산맥』 2021년 겨울호 발표

 

 


 

 

김혜천 시인 / 니체의 아이

 

 

아이가사막을 걸어간다, 바람을 타고

 

열풍이 쓰다만 행간에

여기저기 나뒹구는 해골들, 불립문자다

 

주검을 빠져나간 웅웅거림이 귓가에 맴돌고

빤히 올려다보는 움푹 팬 동공

적막으로 쓰는 슬픈 서사

 

사막은 별이 되지 못한 무수한 알갱이

수억 광년 바람이 접는 주름

a와 c에 어떤 값을 넣을까

선택의 자율은 주름이 지닌 자율이다

 

마지막 여름이 될지 모르는 낙타

그에겐 선택지가 없다

타들어 가는 발바닥

헐떡이는 숨소리가 거칠뿐

설산을 바라보는 사자의 용맹으로는

건기의 사막을 건널 수 있을까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어서 더 이끌리는

타클라마칸 지도는 이미

사라져 간 모나드에 저장되어 있다

 

아이가 사막을 걸어간다, 춤을 추면서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시산맥. 2022) 중에서

 

 


 

 

김혜천 시인 / 침묵의 사계

 

 

시간 속에 스며 있던 침묵이 하루하루 몸을 일으킨다

 

가장 먼저 광장에 도착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한다

공이 담벼락에 맞아 튕겨나오듯 아이들의 말소리가 마치 봄의 사물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 튕겨나온다

 

그렇게 돌연 봄은 오고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하얀 꽃들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돋아나오는 어린 이파리들

한 그루 나무에서 또 한그루의 나무 에게로 옮겨가는 연둣빛 침묵

 

숲속의 침묵이 여름 한낮의 터널을 빠져나온다

거칠게 여름을 부려놓을 적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으나 여름은 소란스럽게 찾아왔다 울울한 숲 사이를 뛰노는 정령들, 고라니가 등불처럼 까만 눈동자를 밝히는 한낮의 고요, 물러날 것 같지 않은 푸른 기세도

 

침묵이 한 번 숨을 고르고 가을이 오면 먼 길 떠나기 전 전깃줄에 앉은 철새들처럼 사과나무가지에 매달려 익어가는 사과들, 떨어지는 사과를 받으려고 내미는 손 사이에 흐르는 정적, 사물의 색이 점차 짙어지고 침묵은 이미 추수의 감사로 사과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노래 속에 공명한다

 

침묵이 눈이 되어 내린다 모든 사물의 공간은 순백의 침묵에게 점령당하고 시간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도 인간의 말도 침묵 속에 갇힌다 침묵은 이정표와도 같이 망각과 용서만이 남은 하얀들판 생각이 정지된 무음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시산맥. 2022) 중에서

 

 


 

 

김혜천 시인 /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

 

 

몽중에 나에게 온 이 문장은

선사시대를 헤엄쳐 온

해독되지 못한 아사 직전의 물고기

붉은 통점(痛點)이 파닥파닥 잠을 깨운다

멈춰버린 농담처럼 행간 속에 가둔 비명의 날들

비늘처럼 달라붙은 남루를 벗긴다

쓰나미 잠들고

산란의 바다를 만날 때까지

그늘마다 검은꽃이 무성하게 피었다

뻘밭에 꼼지락거리는 난해한 기호들

검은꽃의 재해석은 묻어두기로 한다

낮을 되찾고 싶던

긴 밤의 서사를 비문으로 적는다

이제 거침없이

심해를 헤엄칠 수 있겠다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시산맥. 2022) 중에서

 

 


 

김혜천 시인

서울에서 출생. (김혜숙). 2015년 《시문학》 신인우수작품상을 통해 등단.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시산맥, 2022)가 있음. 2017년 이어도문학상, 2020년 푸른시학상 수상. 2022년 시산맥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다도(茶道) 강사, 불교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