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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미선 시인 / 모텔 프린세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30.

송미선 시인 / 모텔 프린세스

 

 

가까이 오면

자동으로 문이 열립니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처럼

네온사인도 켜지 않은 모텔 옆구리

길고양이가숨어든다

발끝에서 나뒹구는 페트병처럼

투 툭, 주름치마가 헤프게 벌어진다

 

치마 속으로 숨어드는 길고양이

 

위태로워 보이는 등을 자동문이 급하게 껴안는다

누구의 탓도 아니라며

잠을 묶어두려고

들고나는 사람들의 프로필을 가려준다

 

성가시게 따라붙는 길고양이를 따돌리며

몇 가지 변명거리를 만든다

얕은 수에 넘어간 쭈그러진 페트병

꽈배기의 반란을 꿈꾼다

 

자동문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골목은 도깨비불이 번쩍인다

주름 탓이라고 우기며 프린세스 출입카드를 꺼낸다

 

 


 

 

송미선 시인 / 달력 주는 여자

 

 

한 해를 통째로 건네준다

이십년 넘게 거르지 않고 챙겨주는 탁상용 달력

열세 번째 달에 그녀가 있다

 

다짐 비슷한 것을 중얼거리며

파랑새를 초대하는 의식을 치루며

첫 장을 넘긴다

한눈팔다가 넘길 시간을 놓치거나

무뎌진 손끝 감각을 탓하여 두 장을 한꺼번에 넘어가도

느긋이 바라봐주는 그녀

 

스프링에 꿰어있는 날들을 넘겨도

가벼워지지 않는다

여러 겹으로 칠한 붉은 동그라미 위로

덧대지던 검은 가위표

비껴선 날들은 등을 벽에 바싹 붙여 서 있다가

하나씩 사라진다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하루의 칼날을 무시하다가

살갗에 베인 핏방울

 

삼백예순다섯 무덤 속에서 던진 부메랑을

솟대에 걸어두고 복식호흡을 한다

십이월 마지막 날

어울릴만한 인사말을 골라 달력 마지막 장을 넘긴다

오래 기다렸다며

이제 오는 거냐고

손 내미는 그녀가 있다

 

 


 

 

송미선 시인 / 관자놀이를 누르니

 

 

알고 있니?

달랠 수 없는 울음이 있다는 거

 

가위눌림에 쫓기다가 숨어든 골목

한 쪽 눈이 떨어진 채 전봇대에 기댄 곰인형이

옆자리를 내어준다

배꼽 대신 관자놀이를 누르니

다른 쪽 눈이 깜박거린다

불리할 때마다 도망친 곳은 막대사탕을 꽂아 둔 골목

이젠 막대만 덩그러니 있다

딱지 진 곳을 찾는다면

가로등 아래는 어때?

 

울음이 오그라드는 순

폭죽처럼 붉은 가로등이 켜졌어

속눈썹을 잘라버려야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비어있던 눈에 입김을 불어 넣었어

한 쪽 눈으로 거리감을 알 수 없다는,

그것은 곰인형의 입장

속울음을 삼키는 곰인형을 달래며

가위를 전봇대에 걸어뒀어

 

울음을 그치게 하려면

내가 식어야겠지?

 

 


 

송미선 시인

경남 김해 출생. 2011시와 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다정하지 않은 하루(시인동네, 2015), 그림자를 함께 사용했다가 있음. 현재 계간 시와 사상편집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