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선 시인 / 모텔 프린세스 가까이 오면 자동으로 문이 열립니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처럼 네온사인도 켜지 않은 모텔 옆구리 길고양이가숨어든다 발끝에서 나뒹구는 페트병처럼 투 툭, 주름치마가 헤프게 벌어진다 치마 속으로 숨어드는 길고양이 위태로워 보이는 등을 자동문이 급하게 껴안는다 누구의 탓도 아니라며 잠을 묶어두려고 들고나는 사람들의 프로필을 가려준다 성가시게 따라붙는 길고양이를 따돌리며 몇 가지 변명거리를 만든다 얕은 수에 넘어간 쭈그러진 페트병 꽈배기의 반란을 꿈꾼다 자동문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골목은 도깨비불이 번쩍인다 주름 탓이라고 우기며 프린세스 출입카드를 꺼낸다 송미선 시인 / 달력 주는 여자 한 해를 통째로 건네준다 이십년 넘게 거르지 않고 챙겨주는 탁상용 달력 열세 번째 달에 그녀가 있다 다짐 비슷한 것을 중얼거리며 파랑새를 초대하는 의식을 치루며 첫 장을 넘긴다 한눈팔다가 넘길 시간을 놓치거나 무뎌진 손끝 감각을 탓하여 두 장을 한꺼번에 넘어가도 느긋이 바라봐주는 그녀 스프링에 꿰어있는 날들을 넘겨도 가벼워지지 않는다 여러 겹으로 칠한 붉은 동그라미 위로 덧대지던 검은 가위표 비껴선 날들은 등을 벽에 바싹 붙여 서 있다가 하나씩 사라진다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하루의 칼날을 무시하다가 살갗에 베인 핏방울 삼백예순다섯 무덤 속에서 던진 부메랑을 솟대에 걸어두고 복식호흡을 한다 십이월 마지막 날 어울릴만한 인사말을 골라 달력 마지막 장을 넘긴다 오래 기다렸다며 이제 오는 거냐고 손 내미는 그녀가 있다 송미선 시인 / 관자놀이를 누르니 알고 있니? 달랠 수 없는 울음이 있다는 거 가위눌림에 쫓기다가 숨어든 골목 한 쪽 눈이 떨어진 채 전봇대에 기댄 곰인형이 옆자리를 내어준다 배꼽 대신 관자놀이를 누르니 다른 쪽 눈이 깜박거린다 불리할 때마다 도망친 곳은 막대사탕을 꽂아 둔 골목 이젠 막대만 덩그러니 있다 딱지 진 곳을 찾는다면 가로등 아래는 어때? 울음이 오그라드는 순 폭죽처럼 붉은 가로등이 켜졌어 속눈썹을 잘라버려야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비어있던 눈에 입김을 불어 넣었어 한 쪽 눈으로 거리감을 알 수 없다는, 그것은 곰인형의 입장 속울음을 삼키는 곰인형을 달래며 가위를 전봇대에 걸어뒀어 울음을 그치게 하려면 내가 식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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