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임희선 시인 / 이름 있는 사람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30.

임희선 시인 / 이름 있는 사람들

 

 

새벽고양이 울음 지우는 청소차 경광등과

간판 불빛 사이에서 태어난,

빠르게 허물어질 그런 이름이 아니죠

 

여기, 새로운 학명을 부여받고

묘표처럼 공손히 새겨진 사람들

 

얼굴에서 눈과 코와 귀를 지우고

광대춤을 추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편한 세상', '숲속의 아침', '미소지움'

식민의 군락에서 칸칸이 통에 담겨 라벨링된

대단한 공명심이 불타오르네요

 

- 우리집 수조에 사는 고래요?

- 기막히게 노래 잘 하죠

- 라 벤더 꽃잎 몇 장 피우면 넘실넘실 향기를 부르죠

- 서식하는 울음이라뇨?

- 바람이 끌고 가는 구름처럼 게으른 삶이 얼마나 편한지요

- 야채가 신선하게 부패하는 중입니다

- 부패 과정을 냉장고는 싱싱하게 보관하죠

- 응접실 바닥에 말라붙은 오렌지 주스처럼 끈끈하게!

- 서로를 좀먹어 가는 거죠

 

대리석 바닥과

차가운 벽이 아름다운 이름 있는 이 공간

안을 감추려면 계속 불을 밝혀야죠

 

이름 갖기에 골몰하는 이들이

유적지를 돌며 나무와 돌에 이름을 새기네요

명품이죠

 

 


 

 

임희선 시인 / 부패하기 좋은 계절이죠

 

 

긁으면 곳곳에서 피가 나요

 

지적하기 좋아하던 엄마 손가락

자주 붉어지던 아빠 목덜미

이완된 꽃향기에 푹푹 썩기 좋은 날씨죠

 

그날,

질주하던 도로들 일제히 멈춰서

아지랑이에 아슬아슬 비명을 피워 올리고

멀쩡하던 건물들 고꾸라져

풀어헤친 땅 속으로 숨 막히게 파고들 때

 

뽀족뽀족 솟은 눈을 마주한 이들, 눈 불거지고

해라! 해라! 해봐라!

새잎들 쑥쑥쑥쑥 죽음을 중얼거리면

결행을 부추기는 분홍핏빛 독려에 소스라치는 햇살

 

사람들은 헐거워진 목을 조이거나

느슨해진 손목에 여러 겹 금을 새겼죠

욕망에 사로잡히기 좋은 계절이라

노란 알약 삼키고 예고 없이 죽음을 반복했죠

 

배후에는 봄이 있었죠

해마다 창궐하는 돌연한 피를 마시고

꽃잎은 찬란한 봄을 피워내고

산뜻한 봄에 감염된 사람들은

개화의 절정에 서둘러 눈을 감았죠

 

다들 모르고 있었죠

사람을 헤치는 봄눈()이야기

봄에 만물은 소생하고, 사람은 소멸하고

 

연둣빛 전언에 신경이 곤두서

잠재해 있던 본능이 요동치면

어때요?

물들기 좋은 계절이죠?

 

- <시사사> 20195-6,

 

 


 

임희선 시인

1974년 대전출생. 2014애지봄호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현재 대전에서 독서논술지도 학원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