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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병수 시인 / 사막을 건넌 나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30.

박병수 시인 / 사막을 건넌 나비

 

 

 돌아보니 안개 대신 모래를 흘리면서 바람이 바람의 방향으로 걸어간다 액막이 무녀가 다녀간 뒤 반세기 전의 내가 반세기 후의 무릎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었다 무너진 집터에는 흰개미가 갉아먹은 문설주와 서까래, 폐허에 머무르다 성체가 된 나비는 꽃이 판 구덩이로 돌아왔다 혼몽을 이마에 묶으면서 명부를 찾는 동안 여름에 진 꽃의 저주가 사막이 되지는 않았지만 바닥의 얼룩을 닦아내자 사막은 시작되었다 허물어진 벽뒤에서 어금니의 말이 모래를 남기고 사라진다 무덤 이전, 나비 이전의 나의 손이 낙타를 끌고 왔다 꿇은 자의 무릎은 목을 조여도 무릎이었다 안개가 부족해서 하늘의 소리를 듣는 새벽, 모래알 하나마다 천 개의 유령이 살고 있다 사막을 벗어나려 다시 사막을 걸어간다 모래를 뿌리면서 바람의 방향을 가늠한다 모래가 공중에서 흩어지면 종횡으로 떠다니는 유령의 음문, 혼몽도 악몽처럼 귀신이 남긴 응답이어서 낙타에 기댄 잠은 꽃을 보게 되었거나 이미 죽은 나비였다 명부에 들지 못한, 잠은 구천을 떠돌다가 모래언덕을 걷고 있다 혼몽은 암설지대를 지나면서 금이 가기 시작한다 무릎의 입속에서 모래를 꺼내주었다 귀신이 다닌 길을 피하면서 산을 오를 까닭이지만, 모래는 한 번도 산을 오른 적이 없다 숲속으로 들어서자 벌레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돌아서서 한참 동안 바라보니 바람이 슬은 나비였다

 

 


 

 

박병수 시인 / 사이렌

 

 

 바람이 사이렌처럼 울어댔다 나는 밤이 왕래하는 창가에 앉아 바람의 세기와 유리창의 흔들림을 바라보며 담장 아래 고여 있는 사계절 꽃물로 낯익은 소년의 머리색깔이나 바꿔 놓고 있었다

 

 사이렌은 요란했다 바람이 되고 남은 오후는 사이렌이 되는 게 분명했다 하나로 모은 귀는 사이렌의 것이었다 그런 후에 천천히 먼지가 되어가는 사람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마른 꽃으로 묶은 날은 골목길을 걸어가도 서러웠다 소년은 낡은 천 조각에 싸여 있던 한번 본 남자보다 더 오래 남자가 되어야할 것이고 사이렌은 슬픔만큼만 창문을 열고 소년 곁에 서 있었다 바람은 경광등 불빛처럼 급하게 달려가고 한번 본 남자는 그보다 더 오래 누워있는 사람들을 이미 만난 적 있다 소년은 창가에 서 있는 사이렌을 머리맡에 옮긴 후에 마른 꽃대로 쓰러진다 태풍이 오고 여름이다 바닷물이 다 쏟아질 때까지 우기이다 해가 바뀐 후에도 사이렌 소리는 요란하고 창문을 열고 있던 소년이 시신처럼 흐느낀다

 

 


 

박병수 시인

경남 창녕 출생. 2009시를 사랑하는 사람들하반기 신인상 당선을 통해 등단. 시집 <사막을 걷는 나비>(2019. 창연기획시선1). 시산맥시회 회원. 영남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