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철 시인 / 창백한 먼지 보라색을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도라지 씨앗을 심어 꽃을 보려고 흙을 고른다. 한쪽이 깨져 모나고 흑빛으로 얼룩진 돌이 호미에 부딪친다. 보이저 1호가 보내온 암흑 속 지구 사진의 이름이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었다는 생각이 난다. ‘창백’과 ‘얼룩’ 사이에서 논란이 있었으나 문학적 표현에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나. 내 이름으로는 얼룩이 어울릴 것 같다. 神쪽에든 우주 쪽에든 나는 인간적이거나 혹은 물질적으로도 어떤 구원이나 역할을 요청할 의향이 없으므로. 저 멀리 아랫마을 분홍 기와집 앞에 우편배달 오토바이가 멈추어 선다. 무엇을 심으려는 것일까. 떠난 사람을? 떠날 神을? 오토바이 옆으로 덤프트럭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솟아오른 흙먼지가 배달부를 뽀얗게 뒤덮는다. 어쩌면 그가 심으려던 사람이나 神도 먼지에 차분히 덮였으리라. 어디에선가, 돌을 심으면 감자나 고양이나 사람까지도 나올지 모른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오래고 오랜 세월이 흘러 돌이 흙이 되고 흙이 먼지가 된다면. 이별은 이별이고 그리움은 그저 견딜 수밖에 없다. 얼룩진 돌이 있던 자리에 피어날 꽃을 생각하며 다시 씨앗 봉투를 집어 든다. 계간 『파란』 2021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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