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심 시인 / 꽃그늘
꽃비 몰고 꽃 오시는 꽃 사월 꽃향기 젖도록 꽃울음 냅니다
폐암 말기, 일흔여섯 해를 이끌어온 몸, 골 깊은 가난의 짐이나 형제 많은 맏이 노릇이나 숨 가쁜 등짐 아닌 적 없었던 삶, 이제야 돌아보니
그 순간이 다 꽃잎이었고 그 고비가 다 꽃송이였다고
거친 숨 몰아쉴 적마다 병실 창밖 꽃잎들 꽃사래 치고 있는데
한 몸 고이 뉘일 꽃그늘에 실바람이 설움의 꽃눈을 꿰어 눈물 한 땀에 눈물 한 땀을 덧입혀 꽃방석을 짜는 오후, 꽃구름 타고 꽃잠 자듯 저꽃 오듯 이꽃 지듯
제 한숨에도 잠이 옵니다 나눠주신 이 꽃그늘 참 좋은 옷 한 벌입니다 당신
-시집 『그리움의 크기』 2020. 지혜
조영심 시인 / 길
눈 귀 가리고 손발을 묶어도
길 없는 길을 돌고 돌아
이렇듯, 향기로 스며드는 너
조영심 시인 / 우두커니
유월 수국처럼 피어나던 웃음기 접고 한마디 말 마중도 없이 마주 앉아 무심한 당신을 봅니다
다순 가슴팍 파고들며 종달이마냥 신나게 쫑알대던 내 입술 닫아걸고 맥없이 퍼져버린 당신의 눈빛, 지척의 거리도 이미 허물어져
보는 둥 마는 둥 켜놓은 티비를 보듯 나도 당신의 그림자만 어룽집니다
한마디 말일랑은 애초에 없었다는 듯 훈짐 한 올 돌지 않은 숨소리, 자다가도 맨발로 내달릴 살가운 버선발 귀한 손님 모시듯 나란히 모아놓고
구름이 퍼져 가는 하늘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살랑이는 나뭇잎 쪽을 보는 것인지 듣는 것인지 말 없는 말을 걸고 있는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게
당신과 나는 아주 서서히 낯설어가는 중입니다
당신에게서 빠져나오는 나를 읽는가 나에게서 사그라지는 당신을 보는가 한 생을 고스란히 접어 향을 피우듯 고요한 발걸음을 옮기듯
우두커니 그 눈빛 따라가는 소슬하게 젖어 드는 내 눈길
-애지, 2022년 가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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