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육 시인 / 후레자식
고향집에서 더는 홀로 살지 못하게 된 여든셋, 치매 앓는 노모를 집 가까운 요양원으로 보낸다
시설도 좋고, 친구들도 많고 거기가 외려 어머니 치료에도 도움이 돼요
1년도 못가 두 손 든 아내는 빛 좋은 개살구들을 골라 여기저기 때깔 좋게 늘어놓는다, 실은 늙은이 냄새, 오줌 지린내가 역겨워서고 외며느리 병수발이 넌덜머리가 나서인데 버럭 고함을 질러보긴 하였지만, 나 역시 별수 없어 끝내 어머닐 적소(適所)로 등 떠민다
애비야, 집에 가서 같이 살면 안 되나? 어머니, 이곳이 집보다 더 좋은 곳이에요 나는 껍질도 안 깐 거짓말을 어머니에게 생으로 먹이고는 언젠가 나까지 내다버릴지 모를 두려운 가족의 품속으로 허겁지겁 돌아온다
고려장이 별 거냐 제 자식 지척에 두고 늙고 병든 것끼리 쓸리어 못 죽고 사는 내 신세가 고려장이지
어머니의 정신 맑은 몇 가닥 말씀에, 폐부에 찔린 나는 병든 개처럼 허정거리며 21세기 막 된 고려인의 집으로 돌아온다 천하에 몹쓸 후레자식이 되어 퉤퉤, 돼먹지 못한 개살구가 되어.
-계간 『다층』(2009, 여름호)
김인육 시인 / 샤갈과 당나귀와 KTX
샤갈이 피어나는 밤이다 샤갈이 날아오르는 밤이다 사륵사륵 젖꼭지 부푸는 사월 밤이다
서울역 광장에서 하늘하늘 꽃잎인 분홍의 여자를 만나다 분홍 여자의 꽃잎을 잡는 붉은 당나귀의 사내를 만나다 뿌우앙뿌우앙 나팔처럼 울어대는 푸른 당나귀를 만나다 꼬꼬댁 꼭꼭 울음 우는 암탉을 만나다 당나귀를 꼬꼬댁 좋아하는 붉은 사과를 만나다 초록 당나귀를 타고 날아오르는 사내를 만나다 당나귀와 눈맞춤 하는 푸른 샤갈을 만나다
휘리릭, 떠나가버린 KTX 아득히 실루엣만 남은 보랏빛 선로의 소실점
샤갈이 잠 못 들며 펄럭이는 밤이다 샤갈이 뿌우앙뿌우앙 당나귀처럼 우는 밤이다 쓰러진 당나귀를 안고 펑펑 함박눈처럼 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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