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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해영 시인 / 현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0.

정해영 시인 / 현미

 

 

몸이 좋아 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영양제라고 하지만

오래 씹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는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서

친필로 서명한

시집을 받았다

 

말미에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신생아처럼

누워 있다

이 어처구니없는 문자를

몇 번 읽었다

 

스며들어서는 안 될 자리에

스며 든 말

되돌릴 수가 없다

 

불편하고 꺽꺽 하여

오래 오래 씹어야 하는

미안한 맛

 

 


 

 

정해영 시인 / 뜨거운 돌

 

 

염천 아래

능소화 피었다

불을 뒤집어쓴 꽃

 

이맘때가 되면

우리는 돌 위에 오래 앉아

있기

놀이를 했다

 

엉덩이가 벌겋게

익어도, 일어서면 지는

뜨거움에 데이는 놀이

 

그것이

생의 은유인 줄도 모르고

 

능소화 옆에서

뜨거운 돌 위에서

 

지지 않으려

타는 듯 벌겋게

먼 곳까지 귀를 열었다

 

 


 

 

정해영 시인 /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밭이랑의 고추모종처럼

슬픔이 자라 있다

 

백년 전에 뿌린 씨앗도

자라 있다

어젯밤에 심은 낱알도

싹이 보인다

 

할머니는 해가 뜨면

밭고랑에 납작 붙었다

종일 엎드린 기도로

가지며 호박이며 고추를

가꾸었다

 

어느 날은 바람 속에서

어느 날은 햇빛 아래서

손발이 저리도록 가꾸는 일은

거두어들이게 하는 일

 

오래 가꾼 이 일은

할머니 농사와 같아

가꾸는 손놀림에 신귀가 붙어

반질*하다

 

슬픔도 오래 가꾸면

거두어들이는 것이 있어

 

한들한들

비바람 앞에서도

가볍게 흔들리다

 

꼭두서니 빛으로 온 하늘을

물들인다

*반질한 슬픔, 최문자 시집 자서에서 차용.

 

-애지 2021년 봄호에서

 

 


 

정해영 시인(1949~2010)

1949년 경북 고령에서 출생. 대구교육대학 졸업. 2009년 《애지》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왼쪽이 쓸쓸하다』가 있음. 대구문인협회 회원 및 물빛 동인. 2010년 4월 12일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