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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혜경 시인 / 캄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3.

노혜경 시인 / 캄캄

바람이 불어온다

불어오는 바람은

무슨 생각으로 불어오는 걸까

어떤 언어도 없이

어루만지면서 불어오는 바람은

벌써 목련 꽃잎을 너무 벌려놓았다

더 활짝 피어

스스로 더 갈 데가 없을 때까지 피어

터져 나오는 목숨으로 피어, 라고 말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듣는 걸까 낙화라고

캄캄한 봄날이 더 캄캄해진다

​​

-시집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실천문학사, 2016

 

 


 

 

노혜경 시인 / 슬퍼할 권리

 

 

슬퍼할 권리를 되찾고 싶어.

잔잔하게 눈물 흘릴 권리 하며,

많은 위로를 받으며 흐느껴 울 권리,

핑핑 코를 풀어대며 통곡할 권리.

지나친 욕심일까―

그러나 울어 보지 못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아니야 울고 싶은 마음조차 먹지 못하고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마련하여

눈물나는 영화를 보러 가서는

남의 슬픔을 빙자하여 실컷실컷 울고 오는

추석날의 기쁨.

고작 남의 울음에 위탁한 울음.

하도 오래 살았더니 울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그러니 누가 나를 좀 안아 다오.

그 가슴을 가리개 삼아 남의 눈물을 숨기고

죽은 듯이 좀 울어 보게.

 

 


 

노혜경 시인

1958년 부산 출생.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1991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새였던 것을 기억하는 새』(고려원, 1995), 『뜯어먹기 좋은 빵』(세계사, 1999), 『캣츠아이』(천년의시작, 2005),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와 에세이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아웃사이더, 2003)가 있음. 대통령비서실 국정홍보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