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 시인 / 캄캄 바람이 불어온다 불어오는 바람은 무슨 생각으로 불어오는 걸까 어떤 언어도 없이 어루만지면서 불어오는 바람은 벌써 목련 꽃잎을 너무 벌려놓았다 더 활짝 피어 스스로 더 갈 데가 없을 때까지 피어 터져 나오는 목숨으로 피어, 라고 말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듣는 걸까 낙화라고 캄캄한 봄날이 더 캄캄해진다 -시집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실천문학사, 2016
노혜경 시인 / 슬퍼할 권리
슬퍼할 권리를 되찾고 싶어. 잔잔하게 눈물 흘릴 권리 하며, 많은 위로를 받으며 흐느껴 울 권리, 핑핑 코를 풀어대며 통곡할 권리. 지나친 욕심일까― 그러나 울어 보지 못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아니야 울고 싶은 마음조차 먹지 못하고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마련하여 눈물나는 영화를 보러 가서는 남의 슬픔을 빙자하여 실컷실컷 울고 오는 추석날의 기쁨. 고작 남의 울음에 위탁한 울음. 하도 오래 살았더니 울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그러니 누가 나를 좀 안아 다오. 그 가슴을 가리개 삼아 남의 눈물을 숨기고 죽은 듯이 좀 울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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