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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512

황병승 시인 / 주치의 h 외 2편 황병승 시인 / 주치의 h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 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2 입 밖으로 걸어 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침.. 2022. 8. 5.
하태린 시인 / 새조개 하태린 시인 / 새조개 잔물결 톡톡 쪼아 물든 부리 껍질을 퍼덕이며 홰를 친다 매끈한 날개 펴고 하늘을 날고 싶은 크니도스의 믿음 날고 싶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패각을 떨쳐버리고 새가 되어 날고 싶다 부리를 뽑아 수평선 너머까지 목청껏 외쳤다 소리를 쫓아 날아온 갈매기 한 마리 쏜살같이 달려들어 그 꿈을 콕 찍어 들어 올렸다 새조개, 드디어 날개를 달다 * 크니도스 Knidos 믿음 : 에게 해에 접한 고대 그리스 도시민의 새조개 숭배 사상 하태린 시인 1962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 경희대 대학원 졸업. 캐나다 밴쿠버 거주. 2013년 《키조개》 외 4편으로 한카문학상 우수상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 시작. 현재 캐나다한국문협 회원, 및 동인. 2022. 8. 5.
[신원섭의 나무와 숲 이야기] (12) 불볕더위에 생각해 보는 나무의 고마움 [신원섭의 나무와 숲 이야기] (12) 불볕더위에 생각해 보는 나무의 고마움 도시를 시원하게 하는 나무 그늘 가톨릭평화신문 2022.08.07 발행 [1673호] 한증막이라는 표현이 실감 날 정도로 냉방이 된 실내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감싼다. 길가 텃밭에 심은 호박잎도 더위에 지쳐 힘없이 늘어져 있다. 여름은 더워야 맛이라고 위로해 보지만 정말 견디기 힘든 더위는 우리의 심리적 상태뿐만 아니라 육체적 건강까지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올해엔 폭염이 길어진다는 예보에 이 여름을 어떻게 날까 걱정이다. 기상청의 자료를 분석한 보도로는 올해 6월 1일∼7월 7일 기간의 전국 평균 최고기온이나 폭염·열대야 일수에서 지금까지 가장 더운 여름이 닥친 해로 꼽히는 1994년과 2016년, 20.. 2022. 8. 5.
전장석 시인 / 난곡동에서 죽음의 방식 외 1편 전장석 시인 / 난곡동에서 죽음의 방식 마치 오랫동안 준비했던 것처럼 죽음은 골방에서 사흘 만에야 꺼내졌다 이웃집 할머니의 말이 적중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들키고 말았다 잠든 척하며 119차에 실리기 전까지 죽음은 가장 평온한 잠에 떨어져 있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 틀니를 물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최초의 발설자가 얼굴을 쓰다듬자 식은 손이 침대 밖으로 튀어나왔다 의심할 여지 없는 자연사라며 구급대원들은 시신을 재빨리 수거하였다 가족들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어쩌면 목격자들이 유가족이 될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길 꼭대기 삶이었다니 이제 길을 내려가야 하지만 팽팽한 곳을 향해 그는 처음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딱 한 번만! 하고 눈 뜨려다 내려가는 길을 보고 안심한 눈을 다시 감았다 -시.. 2022. 8. 5.
장성혜 시인 / 호박넝쿨 외 1편 장성혜 시인 / 호박넝쿨 밤새 광부였던 아버지가 때가 낀 스티로폼 상자에 썩어 들어가는 심장을 심는다 햇볕도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일흔의 마당에 줄이 매어진다 검은 탄가루가 박힌 떠돌던 몸에서 싹이 돋는다 솜털 보송보송한 순이 나온다 막장에서 쉬지 않고 올라오는 기침이 무성하게 줄을 타고 오른다 벽에 누런 가래 꽃이 핀다 덩굴손이 기를 쓰고 녹슨 안테나를 휘감아 오른다 오그라든 가슴이 링거줄에 매달려 있다 말라비틀어진 줄기 가망 없는 벽을 꽉 끌어안고 있다 누렇게 뜬 잎 사이에 시퍼런 주먹 하나가 맺혀 있다 장성혜 시인 / 아우라지를 건너며 검은 개가 따라왔어요. 따라오지 마, 돌을 던졌어요. 검은 개는 먹구름 속에 숨었어요. 휘어진 소나무 위로 달아났어요. 징검다리 건너다 돌아봤어요. 검은 개는 보이지 .. 2022. 8. 5.
김중일 시인 /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외 1편 김중일 시인 /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채널의 접속을 기다리며 하는 상념 지금 만나러 가는 너의 직업은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도 직업일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너는 묻지도 않았는데 만날 때마다 종종 대답한다. 시인은 가장 큰 직업이다. 마치 스스로 드는 미심쩍음에게 하는 대답인 것처럼. 나는 그것을 다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가장 큰 직업' 이라는 말이 좀 걸린다. 그 말은 어쩌면 직업 따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 건 최근의 일이다. '가장 큰 직업' 이란 당최... 무엇일까, 식상하게 삶이나 죽음 같은 것만 아니면 나는 상관없다. 열심히 노동하여 집을 지으면 폭풍이 와도 튼튼한 집이 남지만, 열심히 밤새 지은 '시' 라는 채널.. 2022. 8. 5.
강인한 시인 / 지상의 봄 외 1편 강인한 시인 / 지상의 봄 별이 아름다운 건 걸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들 위에 다시 집을 짓는 이 지상에서 보도블록 깨진 틈새로 어린 쑥이 돋아나고 언덕배기에 토끼풀은 바람보다 푸르다. 허물어 낸 집터에 밤이 내리면 집 없이 떠도는 자의 슬픔이 이슬로 빛나는 거기 고층건물의 음흉한 꿈을 안고 거대한 굴삭기 한 대 짐승처럼 잠들어 있어도 별이 아름다운 건 아직 피어야 할 꽃이 있기 때문이다. 강인한 시인 / 오늘 오는 날을 위한 꽃 꽃다움은 공명할 수 없는 항아리 속으로 지는 잎새. 지난날을 잊기 어려워 차마 버릴 수 없는 곳 그 점을 두고 까악 까악 우짖는 갈가마귀. ― 배앵 돌다 아래로 떨어진다. 아아, 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날개를 퍼덕이다 가루 된 심장. 나갈 수 없는 구.. 2022. 8. 5.
[가톨릭교회의 거룩한 표징들] (12) 성경 속 문자 [가톨릭교회의 거룩한 표징들] (12) 성경 속 문자 알파와 오메가, 영원하신 하느님을 상징 가톨릭평화신문 2022.08.07 발행 [1673호] ▲ ‘A’와 ‘Ω’는 영원하신 하느님을 상징할 뿐 아니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지배자로서 종말에 심판자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 왕’, 프레스코, 4세기, 콤모딜라 카타콤, 로마. 성경 속 ‘수’(數)의 의미에 관해 살펴봤었다. 고대와 중세인들은 물론이고 현대인들도 가끔 재미삼아 숫자로 그 날의 운세를 알아보곤 한다. 또 특정 수가 심리적으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동서양 불문이다. 서양에선 지금도 ‘13일의 금요일’을 불길한 날로 여긴다. 요즈음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4’를 ‘죽음’(死)과 연관 지어 불길한 수.. 2022. 8. 5.
임희숙 시인 / 수박씨 외 1편 임희숙 시인 / 수박씨 수박씨가 흩어진 풀꽃무늬 쟁반 위로 여름비가 내리고 우물처럼 깊어지는 풀꽃이 벌레가 두고 간 껍질과 짐승의 흰 터럭을 간지럽히는 어느덧 쟁반 속 풀꽃은 시들어 우물이 마르고 눈이 내리고 어긋난 무릎의 각질이 우물 속에 쌓이는 동안 다시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수박씨는 무덤처럼 부풀어 잘 발효된 수액이 붉은 홍수처럼 널브려졌다 다행히 빙하기는 오지 않았고 창세기는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온갖 풀꽃들과 짐승들을 키워낸 시간이 작은 씨앗의 방패를 뚫고 들어가는 이제 수박씨가 우물을 삼키는 시간 다시 우물이 수박을 키워내는 시간 누구나 한 생은 그렇게 시작된다 임희숙 시인 / 니스, 푸른 비둘기 비둘기 한 마리 에소프레소, 깊이 잠든 커피나무를 깨우는구나 부리로 길어낸 열매를 탁자보에 문지.. 2022. 8. 5.
김신용 시인 / 돌에 관한 에피소드 1 김신용 시인 / 돌에 관한 에피소드 1 돌도 마스크를 하고 뒹구는 것 같은 날이다 코로나19 때문에 한산해진 거리를 걷는다 거리가 이안류에 휩쓸린 것 같다 바다 밑으로 보이지 않게 빠져나가는 빠른 물살의 흐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저 역류―. 기억해보면 불행은 언제나 이 물의 흐름처럼 온다 마치 싱크홀처럼, 모든 것을 비극으로 침몰시키는 거대한 상상력 같다 거리의 나무들도 방호복을 입은 채 비대면으로 서 있다 나뭇잎도 수어처럼 흔들린다 바람이 냉동트럭에 실린 시신의 감촉으로 살갗에 닿는다 상상은 무섭다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바이러스처럼 전신을 파고든다 공기도 무수한 시신들의 매장지로 변한 뉴욕의 하트 섬처럼 부푼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에피소드가 아니라 인류의 시간을.. 2022. 8. 5.
조윤희 시인(김해) / 홍매화의 향연 외 2편 조윤희 시인(김해) / 홍매화의 향연 겨울의 마지막 자락 동여맨 틈바구니로 시리도록 시린 시간을 깨뜨리는 홍매화가 한창이다 뉘라서 알았을까 아름다운 것도 찬란한 칼날의 향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간보다 먼저 서두르는 성급한 꽃들의 춤사위 겨울 속 흔적들을 지워내고 새로운 날을 꿈꾸게 한다 함께 할 따뜻한 시간 속으로 홍조띤 미소 머금은 홍매의 춤이 붉게 수놓아 갈수록 설레이는 봄향은 짙어만 간다 조윤희 시인(김해) / 함덕 해수욕장에서 한겹 한겹 고운 선율로 왔다가 물러가는 그대의 발걸음을 넋놓고 듣고 앉았다 함덕의 고운 모래펄 사이로 가을이 스며든 줄 알았더니 봄밤의 랩소디가 향기롭게 귓가를 적신다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기다림을 안아주려 다가온 듯 낯선 밤의 바다는 그대의 향기처럼 포근하기만 하다 조윤.. 2022. 8. 5.
안희연 시인 /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안희연 시인 /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나는 핏기가 남아 있는 도마와 반대편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오늘은 발목이 부러진 새들을 주워 꽃다발을 만들었지요 벌겋고 물컹한 얼굴들 뻐끔거리는 이 어린 것들을 좀 보세요 은밀해지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나의 화분은 치사량의 그늘을 머금고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창밖엔 지겹도록 눈이 옵니다 나는 벽난로 속에 마른 장작을 넣다 말고 새하얀 몰락에 대해 생각해요 호수, 발자국, 목소리…… 지붕 없는 것들은 모조리 파묻혔는데 장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담장이 필요한 걸까요 초대하지 않은 편지만이 문을 두드려요 빈 액자를 걸어두고 기다려보는 거예요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물고기의 비늘을 긁어 담아놓은 유리병 속에 새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별들은 밤새도록 곤두박.. 2022.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