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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육근상 시인 / 여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5.

육근상 시인 / 여우

 

 

정월은 여우 출몰 잦은 달이라서 깊게 가라앉아 있다

저녁 참지 못한 대숲이 꼬리 흔들며 언덕 넘어가자

컹컹 개 짖는 소리 담장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런 날 새벽에는 여우가 마당 한 바퀴 돌고

털갈이하듯 몸 털어 장독대 모여들기 시작하지

배가 나와 걱정인 장독은 웅기종기 숨만 쉬고 있었을지도 몰라

여우는 골똘하게 새벽에 기다린다

고욤나무 가지에도 신발 가지런한 댓돌에도

고리짝 두 개 서 있는 대청까지 들어와

바람을 토굴처럼 열어 세상 엿보고 있다

 

나는 칼바람 몰아치는 정월이면

문풍지 우는 소리 견디지 못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럴 때마다 화진포에서 왔다는 노파가 간자미회 버무려 주는 집에서

며칠이고 머물다 돌아오곤 하였다

 

소나무가 한쪽 팔 잃고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은

밤새 여우가 길 내어 올라간 북방 그리워하는 것

나는 북방 사내인 듯 여우 지나간 길 한참 바라보다

새벽밥 툭툭 털고 일어나 마당에 나서면

흰 털 보송보송한 여우가 뽀드득뽀드득 소리 내어 따라왔다

 

오늘처럼 솜눈이 푹푹 날리는 날이면

나는 어디를 급히 다녀와야 할 사람처럼

고욤나무 아래에서 여린 가지 바람 타는 소리로

꼬리만 남은 강변길 우두커니 바라본다

대숲도 따라나서고 싶은지

여우 지나간 길 흰 그림자 내어 굽어보고 있다

 

 


 

 

육근상 시인 / 가을밤

 

 

풀벌레 울음 가슴을 찢는 밤이다

먹감나무 이파리가 먼 길 다녀온 듯

툇마루 내려앉으며 적막을 깬다

 

나는 바람벽 비스듬히 기대어

안방 바라보는데

한숨인 듯 앓는 소리인 듯

가쁘게 몰아쉬던 숨소리도 없이

텅 빈 방이

컴컴하게 뚫어놓은 굴속 같다

 

나지막이 엄마 하고 부르니

아랫목 깔아놓은 이불이

자다 꿈을 꾼 듯 누구여 애비여 언제 들어온겨

아이고 깜짝 놀랐네

또 꿈속으로 들어간 듯 찌푸린 미간으로

고욤나무 가지 걸린 달이 노랗게 익어간다.

 

나는 컴컴한 빈방 향하여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는 바람벽에서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내가 다시 엄마 하고 부르니

텃밭 풀벌레가 나를 따라 하는 듯

엄마 하고 우는 밤이다

 

 


 

 

육근상 시인 / 별

 

 

품속 같다 무엇이든 끌어안고 있으면 한 생명 얻을 수 있겠다

 

겨우내 버려두었던 텃밭도 품속 따뜻했는지 연두가 기지개다 뽀족한 입술 가진 호미도 헛바닥 넓은 꽃삽도 품속 그리웠는지 입술 묻고 뗄 줄 모른다 나를 품었던 엄니도 이제 품속 돌아가려는지 양지녘 볕을 있는 힘껏 끌어모으신다

 

품속 내려놓은 어미 닭이 병아리들 꽁무니 매달고 의젓하게 마당 맴돌고 있다

 

 


 

육근상(陸根箱) 시인

1960년 대전에서 출생. 1991년 《삶의 문학》에 〈천개동〉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절창》(솔, 2013), 《만개》(솔, 2016), 《우술필담》(솔, 2018) 등이 있음. 2016년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창작지원금을 수혜. 제12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뇌신경센터 임상병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