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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주용 시인 / 나뭇잎 신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6.

박주용 시인 / 나뭇잎 신발

 

 

 처음엔 지축이 기울어 신발 닳는 줄 알았네 푸른 비늘에 바람 들면 웃음도 그냥 가벼워지는 줄 알았네 허나 시간이 이울수록 숨 깊었던 달빛도 흐릿해지고 뻐꾸기 울음도 등뼈를 슬슬 빠져나가 물관이 시나브로 마르는 것이었네 증상은 점점 심해져 습했던 속눈썹도 어리둥절해지고 작은 바람에도 염기 없이 실실 웃는 것이었네 숨 가쁘게 살아도 자꾸 주눅 들어 옆으로 드러눕기도 하고 자신을 마셔버린 취객처럼 지그재그로 걸으며 가끔 구름 발자국이라도 찍어 보는 것이었네 자전과 공전의 징한 삼백예순 어느 날 로또 가게 지나다 물컹한 혜성이라도 만난다면 그 꼬리 덥석 잘라 닳아진 곳 깔창으로 괴어보고 싶은 생각도 왜 드는 것이었네 나 활엽수는 이름만 화려하지 걸음이 비정규직 팔자라 신발이 바깥쪽으로만 닳는 것이어서 열두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겨울을 맨 발로 견디어 가는 것이었네

 

 


 

 

박주용 시인 / 아내를 못 말리는 여자라고 하는 까닭은

 

 

시골길 가다 문득 차 세워 놓고

가느다란 목 코스모스에 기대고는

가을 적시기 때문이다

묻혀갈 한 평 남짓 땅, 저 구름 위에 자리 깔아놓고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양 떼며, 꽃이며, 새털 보며

하늘 적시기 때문이다, 맑은 개울

은빛 피라미보다도 속살거리는

미루나무 이파리 배꼽 뒤집히는 이야기에도

웃음 적시기 때문이다

아내를 못 말리는 여자라고 하는 까닭은

아파트 뒤편 산비탈, 예닐곱 평 남짓 뿌려 놓은

쑥갓, 시금치, 상추, 열무 이름대로 고개 드는 모습에도

텃밭 적시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날

아이들 자고 있는 도회지의 밤 일으켜

홍등 켜져 있는 동네 생맥주집에 앉아

궁둥이 보다도 더 질펀하게

술잔 적시기 때문이다, 달빛 드는 베란다 무릎 사이로

민달팽이 한 마리 지나면 난초 촉 같은 곰삭은 첫사랑에

시동 걸다가도 이내 싱크대로 돌아와

손등 적시기 때문이다

 

- 점자, 그녀가 환하다』 (시산맥사, 2016)

 

 


 

박주용 시인

충북 옥천에서 출생. 충남대와 건양대 대학원 졸업. 2014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점자, 그녀가 환하다』, 『지는 것들의 이름 불러보면』이 있음. 현재 화요문학 동인, 시산맥 특별회원, 건양대학교병설건양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