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종호 시인 / 그대의 벽지(僻地)
바람은 늘 포구로부터 불어왔다. 거기서는 닿을 수 없는 정적이 홀로 젖어 있다. 자정이면 썰물의 향방에 씻기는 그대 맨발.
어느 지체(肢體)도 떠는 듯싶다. 강약조에 몸을 맡긴 뱃전들의 숙취는 안개 저쪽 어떤 날개를 예비하고 있을까.
온몸을 밝혀 뜬 만월의 때에도 우리는 손톱 밑에 숨겨 둔 죄의 의미를 밝히지 못한다. 꿈, 사랑도 그렇다. 문득 낡은 소매의 어둠이 부리는 어망 안으로 근해(近海)의 눈먼 고기들이 찾아 헤매는 고향.
그것은 최초의 한 가닥 빛이었는가 잠속의 무한 눈물이었는가 바람의 통로를 따라 더 멀고 강한 구름을 쫓는 바닷새들 부러진 돛들, 폭풍의 수많은 바위틈으로 밤새 철석이는 어둠의 이마들.
새벽이면 하얀 소금으로 남는 이여. 쩍쩍 등 갈라진 간조(干湖)의 몸을 일으키면 그때마다 수천 마리 게가 되어 뭍으로 기어오르는 그대 맨발 보라. 단 한번 포구로부터 저 빛나는 거품들의 시원(始原).
-<그대의 벽지>, 문학사상사, 1983
손종호 시인 / 공중에서부터 집짓기 1
구름의 태 속에 들어가 구름이 된 자는 알지 공기 속에는 물의 혼이 살고 그 물들 모여 구름을 이루듯
우리의 살 속에 무지개가 살고 그 무지개들 모여 천상의 길을 이루고 있음을.
그 길 따라 새벽별 빛나면 한 이슬이 또 한 잎새를 깨우고 내려와 또 한 풀잎을 깨우고
그 길 따라 겨울이 오면 작고 하얀 침묵들은 모여 더 큰 순결한 침묵 흰 빛은 더욱 큰 흰 빛으로 누리를 묶고 빈 가슴들을 묶어
새벽 문 밀치고 들판에 서면 아아 한 가지 모음母音으로 출렁이는 어머니의 바다 한 손길로 일체를 덮는 태초의 그 무궁한 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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