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용 시인 / 나뭇잎 신발
처음엔 지축이 기울어 신발 닳는 줄 알았네 푸른 비늘에 바람 들면 웃음도 그냥 가벼워지는 줄 알았네 허나 시간이 이울수록 숨 깊었던 달빛도 흐릿해지고 뻐꾸기 울음도 등뼈를 슬슬 빠져나가 물관이 시나브로 마르는 것이었네 증상은 점점 심해져 습했던 속눈썹도 어리둥절해지고 작은 바람에도 염기 없이 실실 웃는 것이었네 숨 가쁘게 살아도 자꾸 주눅 들어 옆으로 드러눕기도 하고 자신을 마셔버린 취객처럼 지그재그로 걸으며 가끔 구름 발자국이라도 찍어 보는 것이었네 자전과 공전의 징한 삼백예순 어느 날 로또 가게 지나다 물컹한 혜성이라도 만난다면 그 꼬리 덥석 잘라 닳아진 곳 깔창으로 괴어보고 싶은 생각도 왜 드는 것이었네 나 활엽수는 이름만 화려하지 걸음이 비정규직 팔자라 신발이 바깥쪽으로만 닳는 것이어서 열두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겨울을 맨 발로 견디어 가는 것이었네
박주용 시인 / 아내를 못 말리는 여자라고 하는 까닭은
시골길 가다 문득 차 세워 놓고 가느다란 목 코스모스에 기대고는 가을 적시기 때문이다 묻혀갈 한 평 남짓 땅, 저 구름 위에 자리 깔아놓고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양 떼며, 꽃이며, 새털 보며 하늘 적시기 때문이다, 맑은 개울 은빛 피라미보다도 속살거리는 미루나무 이파리 배꼽 뒤집히는 이야기에도 웃음 적시기 때문이다 아내를 못 말리는 여자라고 하는 까닭은 아파트 뒤편 산비탈, 예닐곱 평 남짓 뿌려 놓은 쑥갓, 시금치, 상추, 열무 이름대로 고개 드는 모습에도 텃밭 적시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날 아이들 자고 있는 도회지의 밤 일으켜 홍등 켜져 있는 동네 생맥주집에 앉아 궁둥이 보다도 더 질펀하게 술잔 적시기 때문이다, 달빛 드는 베란다 무릎 사이로 민달팽이 한 마리 지나면 난초 촉 같은 곰삭은 첫사랑에 시동 걸다가도 이내 싱크대로 돌아와 손등 적시기 때문이다
- 점자, 그녀가 환하다』 (시산맥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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