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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종호 시인 / 그대의 벽지(僻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6.

손종호 시인 / 그대의 벽지(僻地)

 

 

바람은 늘 포구로부터 불어왔다.

거기서는

닿을 수 없는 정적이 홀로 젖어 있다.

자정이면 썰물의 향방에 씻기는

그대 맨발.

 

어느 지체(肢體)도 떠는 듯싶다.

강약조에 몸을 맡긴 뱃전들의 숙취는

안개 저쪽

어떤 날개를 예비하고 있을까.

 

온몸을 밝혀 뜬 만월의 때에도

우리는 손톱 밑에 숨겨 둔 죄의 의미를 밝히지 못한다.

꿈, 사랑도 그렇다.

문득 낡은 소매의 어둠이 부리는 어망 안으로

근해(近海)의 눈먼 고기들이 찾아 헤매는 고향.

 

그것은 최초의 한 가닥 빛이었는가

잠속의 무한 눈물이었는가

바람의 통로를 따라

더 멀고 강한 구름을 쫓는 바닷새들

부러진 돛들, 폭풍의 수많은 바위틈으로 밤새 철석이는 어둠의 이마들.

 

새벽이면 하얀 소금으로 남는 이여.

쩍쩍 등 갈라진 간조(干湖)의 몸을 일으키면

그때마다 수천 마리 게가 되어

뭍으로 기어오르는 그대 맨발

보라. 단 한번 포구로부터

저 빛나는 거품들의 시원(始原).

 

-<그대의 벽지>, 문학사상사, 1983

 

 


 

 

손종호 시인 / 공중에서부터 집짓기 1

 

 

구름의 태 속에 들어가

구름이 된 자는 알지

공기 속에는 물의 혼이 살고

그 물들 모여 구름을 이루듯

 

우리의 살 속에 무지개가 살고

그 무지개들 모여

천상의 길을 이루고 있음을.

 

그 길 따라 새벽별 빛나면

한 이슬이 또 한 잎새를 깨우고

내려와 또 한 풀잎을 깨우고

 

그 길 따라 겨울이 오면

작고 하얀 침묵들은 모여

더 큰 순결한 침묵

흰 빛은 더욱 큰 흰 빛으로

누리를 묶고 빈 가슴들을 묶어

 

새벽 문 밀치고 들판에 서면

아아 한 가지 모음母音으로 출렁이는

어머니의 바다

한 손길로 일체를 덮는

태초의 그 무궁한 온유.

 

 


 

손종호 시인

1949년 대전에서 출생. 시인, 문학박사, 신학박사. 충남대학교 대학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졸업.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의 당선과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새들의 현관』외 다수 있음. 문학사상 신인상, 한국비평문학상 본상 수상. 현재 충남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