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연 시인 / 풀의 시간
아침의 기후로 날아든 영혼, 마중하는 자세로 비가 내립니다
여기가 어디던가
낯익은 흙의 온기에 풀은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입문을 열어 푸르름을 보여줍니다
이른 아침 몸을 낮추고 다가서면 잠 깨어 기지개 켜는 소리 들을 수 있습니다
햇살의 어부바에 재롱을 부리고 바람의 술래에 균형을 잡다가도 투박한 손끝에서 칭얼거리면 어느새 땅은 촉촉한 눈빛으로 젖을 물립니다
누군가는 새 옷을 갈아입고 길을 떠나는데
풀은 온전히 풀의 시간을 살아내고만 있습니다
신영연 시인 / 유리병은 입술을 닫고
월미도 향한 바닷길 부르다 목 메인 그대의 끝자락, 갈매기가 날아오네
입을 닫았네 귀도 닫았네 둥둥 몸은 뜨기 시작했네 쏟아지는 말들을 혀끝으로 감싸 안고 물의 길로 들어서네
어둠이 내게 길을 물었으나 입을 열 수 없네 파도에 밀쳐 부딪는 바위, 첫눈에 반했다는 물고기의 반응에는 잠시 눈망울이 흔들렸네 달빛은 손을 내밀어 잡으라 했으나 왕왕 길을 잃기도 하였다네
물길로 끌리는지 물길 되어 흐르는지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한 듯 흘렀네 한 세월은 건너야 할 많은 이야기가 바닷 속으로 던져졌네
유리병에 담긴 편지 한 장 입에 물고 그대 향해 출발한지, 백년이네
시집『바위눈』(시와정신,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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