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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기화 시인 / 고슴도치의 나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2.

김기화 시인 / 고슴도치의 나날

 

 어느 날 그녀가 고슴도치 같은 고추를 낳았습니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조각이었지요 어화둥둥 벚꽃 흐드러진 봄날 속으로 기저귀를 내걸었습니다 꼬물거리며 배냇짓을 할 때면 신비하게도 우주가 보였습니다 단단한 고추, 붉은 고추를 엮어 대문짝에도 걸었지요 바람은 조각상을 파고들어 팔과 다리를 흔들어주고 무럭무럭 하늘을 향해 휘젓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악몽 같은 울음보를 터뜨리면 그 놈 참 목청이 좋다 날이 갈수록 장군멍군 운운하며 털을 곧추세웠지요 아장아장 첫걸음을 떼던 날은 온 식구가 잔치를 열자 소문이 퍼진 동네에서는 돌떡을 돌려보라며 박수를 쳤습니다 그 박수소리를 따라 웃자란 고추는 계속 걸어갔지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지만 곧잘 일어나 툭툭 손을 털었습니다 세상은 맨발바닥 밑에서부터 아프게 왔지만 상처 난 고추는 드넓은 광장이 좋아 마구 뒹굴었습니다 아찔한 봄날이었죠, 군락 속에서 만난 그녀는 또 다른 별이었습니다 마법의 성에서 나온 듯한 긴 생머리 소녀는 악수를 하자마자 매운 향기를 내뿜었습니다 통증처럼 붉어진 고추는 수시로 떠나는 연습을 하는지 두 팔을 뻗을 때마다 등을 돌리는 일이 잦아졌지요 바람은 시간처럼 달려와 꽃을 피웠습니다 또 그렇게 봄은 오고 검붉어진 고추는 다시 그녀의 볼을 비볐습니다 한 걸음씩 멀어졌던 홀로서기의 굵은 고추는 순한 눈으로 그녀의 젖무덤을 헤집고 들었습니다 파르라니 깎은 고슴도치 한 마리가 그녀의 눈자위에 붉은 꽃잎으로 축축하게 내려앉았습니다 질식할 것 같은 봄꽃 속으로 고추는 발진처럼 숨어들었지요 또 다른 그녀가 독한 향처럼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김기화 시인 / 시집을 짓다

 

 

시인께, 라는 두 글자에 겸허해진 오후

밭고랑에서 호미질을 하던 그녀는

한 걸음에 시인이 된다

흙살 속에 부려놓은 씨알 같은 활자들이

바탕체의 곧은 이랑에서 물꼬를 찾는다

거울 앞에 앉아 머리 손질을 하고

바람이 먼저 다녀간 책갈피를 넘긴다

한 그루의 나무를 타고 오른 문장에는

새가 다녀간 말없음표가 즐비하다

집안에는 피돌기 바퀴라도 달려있는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녀가 들락거렸다

아리아리 송송송 잔상으로 차려진

저 집은 들출수록 맛이 나는 것이다

수다스런 햇살이 빗금처럼 걸려있는 창

어금니로 꾹 눌러놓은 듯

마침표처럼 소박한 시집에 들어있다가

첩첩산중 계곡으로 더 들어가 보기로 한다

해질녘 노을은 뒷목부터 뻐근한데

온기를 찾아든 집시들의 눈동자가 붉은 저녁

시집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녀가

서둘러 옷소매를 걷어붙인다

오후 여섯 시 예약된 밥솥 압력추가 흔들린다

시집 밖에서 부르는 소리

시집 안에서 깨어나는 소리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2년 · 하반기 제7호

 

 


 

김기화 시인

충북 청주 출생. 2010년 《시에》 봄호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아메바의 춤』이 있음. 시에 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