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아 시인 / 오렌지나무를 오르다
뿌리 앞에 서면 들린다 물관 깊이 물 흐르는 소리, 나무 위를 오르는 치어 떼들이 아가미 여닫는 소리, 설익은 비린내가 가지 끝에서 대롱인다 나는 잠속에 빠져 있는 등본을 깨워 주소를 받아낸다 산 1리 2번지여 안녕? 대추나무 가지가 담벼락에 팔을 뻗고, 마당에선 백일홍이 쿨렁인다 옷자락 비비는 소리가 문지방을 넘어, 더럭 신발을 들춘다 한 무더기의 별들이 진분홍 빛 잇몸을 드러낸다 창을 열어 젖멍울을 익히던 소녀, 거취 불명 같은 사춘기의 문을 빠져 나와 창을 두드리면 카나리아가 노래를 흘리고, 바게트 빵 굽는 냄새가 난다 변성의 소리를 가진 짝사랑의 남자와 동거하던 일기장, 주홍빛 알전구가 속살을 붉힌다 치어 떼를 품은 껍질을 단단하다 입 안 가득 넣으면 톡톡 단물 터뜨리는 푸르른 날들
오렌지나무를 오르면 나는 백 촉의 오렌지로 불 켜진다.
전정아 시인 / 발자국 아래의 시간
타인의 발자국 밑에 묻힌 내 발자국은 긴 잠을 자는가 보네 주소를 물어봐도 번지수를 말해주지 않네 즐겨 불렀던 아가위나무는 지평선 어딘가에서 메아리로 돌고 있는가 내 노래는 홀로 오솔길을 거닐며 침묵 한 올씩 뜨개질하다 뒤돌아오네 교회당 옆 젖소우리 정오를 씹으며 햇볕을 반추하던 새끼 밴 암소 개망초꽃 웅성거리는 사이로 늙은 촌부의 물기 어린 기도가 저녁 종소리를 몰고 마을 골목으로 흘러가던 곳 누군가 부르는 듯해서 돌아보면 푸른 아가위나무 이파리 혼자 제 몸 부딪히고 있네 발자국 아래 잠든 기억들이 발자국 위를 들춰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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