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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정아 시인 / 오렌지나무를 오르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4.

전정아 시인 / 오렌지나무를 오르다

 

 

뿌리 앞에 서면 들린다 물관 깊이 물 흐르는 소리, 나무 위를

오르는 치어 떼들이 아가미 여닫는 소리, 설익은 비린내가 가지 끝에서

대롱인다 나는 잠속에 빠져 있는 등본을 깨워 주소를 받아낸다

산 1리 2번지여 안녕? 대추나무 가지가 담벼락에 팔을 뻗고,

마당에선 백일홍이 쿨렁인다 옷자락 비비는 소리가

문지방을 넘어, 더럭 신발을 들춘다 한 무더기의 별들이

진분홍 빛 잇몸을 드러낸다 창을 열어 젖멍울을 익히던 소녀, 거취

불명 같은 사춘기의 문을 빠져 나와 창을 두드리면 카나리아가

노래를 흘리고, 바게트 빵 굽는 냄새가 난다 변성의 소리를 가진

짝사랑의 남자와 동거하던 일기장, 주홍빛 알전구가 속살을

붉힌다 치어 떼를 품은 껍질을 단단하다 입 안 가득 넣으면 톡톡

단물 터뜨리는 푸르른 날들

 

오렌지나무를 오르면 나는 백 촉의 오렌지로 불 켜진다.

 

 


 

 

전정아 시인 / 발자국 아래의 시간

 

 

타인의 발자국 밑에 묻힌

내 발자국은 긴 잠을 자는가 보네

주소를 물어봐도

번지수를 말해주지 않네

즐겨 불렀던 아가위나무는

지평선 어딘가에서

메아리로 돌고 있는가

내 노래는 홀로 오솔길을 거닐며

침묵 한 올씩 뜨개질하다 뒤돌아오네

교회당 옆 젖소우리

정오를 씹으며

햇볕을 반추하던 새끼 밴 암소

개망초꽃 웅성거리는 사이로

늙은 촌부의 물기 어린 기도가

저녁 종소리를 몰고

마을 골목으로 흘러가던 곳

누군가 부르는 듯해서 돌아보면

푸른 아가위나무 이파리 혼자

제 몸 부딪히고 있네

발자국 아래 잠든 기억들이

발자국 위를 들춰보고 있네

 

 


 

전정아 시인

1973년 강원도 원천리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 <시와창작> 신인상. 2006년 《문학·선》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오렌지 나무를 오르다』(문학의 전당, 2010)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