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08/0412

홍용희 시인 / 첫눈 홍용희 시인 / 첫눈 첫눈이 오네요 봄날 헤어졌던 목련이 펼펄 내리네요 먼 북회귀선을 돌아오네요 어느 꿈길을 돌아 오네요 온몸이 부서진 채 펼펄 내리네요 아무 말을 못해서 하아얀 입김처럼 내리네요 먹먹한 메아리로 내리네요 천갈래 만갈래 사랑이 내리네요 천갈래 만갈래 이별이 내리네요 첫눈이 오네요 봄날 헤어졌던 목련이 펄펄 내리네요 홍용희 시인 1966년 경북 안동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받음. 1995년 《중앙일보 》평론 당선, 2018년 시 계간지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며 활동. 저서로는 『고요한 중심을 찾아서』 등이 있음. 제1회 젊은 평론가상. 제13회 편운문학상 수상. 유심문학상, 김달진 문학상 등 수상, 현재 계간 , 편집위원.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2022. 8. 4.
희음 시인(문희정) / 미끄럼 외 2편 희음 시인(문희정) / 미끄럼 빛이 내려. 빛이 눈의 육신을 빌린 거야. 그는 짐승을 보고 웃는다. 우린 생선을 나눠 먹는 사이. 둘은 눈이 닮은 것 같다. 그렇게 말해주는 걸 그가 좋아했다. 커피를 내려줄까. 고양이 울음이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인사 없이 나는 그 집을 나왔다. 빛이 그쳤는데 빛이 계속되었다. 녹아야 할 것이 녹지 않았다. 낙엽과 가래침과 아이의 웃음이 한 데 뒤엉켰다. 지치지 않았다. 더러워졌다. 눈밭 위에서 훌라후프를 돌리는 소녀와 얼어붙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짐승이 있었고 나는 이곳을 빠르게 지나야 한다, 중얼거리는 사이 햇빛을 누가 이겨. 언젠가는 모든 게 그 앞에서 옷을 벗는 걸. 허스키 보이스. 허스키 노이즈. 중얼거리는 건 나밖에 없는데 넘어지지 않았는데 청바지와 손.. 2022. 8. 4.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성인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성인 가톨릭신문 2022-07-31 [제3305호, 15면] 성인이라고 완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찰하며 노력한 이들 성인들 삶 그대로 모방하기보다 각자 자신의 길 성실히 걸어가야 헤르트 반 혼토르스트의 ‘베드로의 부인’(1620년 작품). 우리 교회에서는 성인 신심이 아주 중요한 신심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세례명을 자신이 좋아하고 따르고 싶은 성인들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인들을 따르는 삶을 살려고 성인전을 읽으면서 생기는 심리적 문제들이 있습니다. 일명 ‘성인 콤플렉스’. 성인처럼 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종교적 열등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인들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혐오하기조차 하는 경우들도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왜 그런.. 2022. 8. 4.
김은우 시인 / 오후의 문장 외 1편 김은우 시인 / 오후의 문장 붉은 장미가 담벼락에 긴 팔을 뻗어 햇살을 잡아당기는 동안 공중에 내던져지는 돌멩이처럼 어디에서 멈춰야할지 알 수 없는 어리둥절한 시간이 오고 멀리 가는 기차 멀리 가는 새 멀리 가는 구름 멀리 가는 당신들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오후 세 시의 햇살은 독립적이다 가장 멀리 가는 길을 찾는 내 몸은 점점 길어지고 목이 마르고 누군가 내 몸을 조금씩 잘라내는 오후 한 시간 씩 이백년 전에 죽은 사람을 생각하고 한 시간 씩 무인도에 갈 가방을 챙기고 한 시간 씩 머리를 감고도 남은 시간 엎드려 낮잠을 잘 때 어디선가 오래된 연인들이 헤어지고 어디선가 새로운 연인들이 생겨나고 김은우 시인 / 물고기의 진화 길달리기새의 발바닥을 씻겨주다 보았다 물고기가 나무에 오르는 걸 물고기는 쉽게.. 2022. 8. 4.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성 바오로 수도회(상)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성 바오로 수도회(상) 매스미디어 통한 복음 전파 나서 가톨릭신문 2022-07-31 [제3305호, 4면] 성 바오로 수도회 창립자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 ‘사회 홍보 수단을 통한 복음화.’ 복자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James Alberione, 이하 알베리오네 신부)는 이 신념으로 1914년 8월 20일 이탈리아 알바에서 성 바오로 수도회를 창립했다. 현대 문명이 제공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가장 신속하고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이러한 신념은 그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밤, 성체에서 특별한 빛을 받고 새로운 세기의 사람들과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할 것을 결심하면서 나왔다. 당시 유럽 사회는 계몽주의 이후 이성 중심주의적인 자유주.. 2022. 8. 4.
최진화 시인 / 꿈 외 4편 최진화 시인 / 꿈 시간의 천 가지 얼굴들이 만든 초배지 행여 찢어질까 숨도 못 쉬고 비 그치지 않는 하늘 아래 서성이는 밤 사라지지 않는 날것의 비린내가 새어 나올까봐 풀칠하는 손끝에 울음이 묻어나는데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나요 이렇게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할 것을 수만 겹 종이는 녹아서 내 살이 됩니다 당신이 허락하신 마지막 잠 속에서 최진화 시인 / 푸른 사과의 시절 오늘도 민이의 자리에는 가방만 앉아 있어요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무서워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지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아 엄마의 치마꼬리만 붙잡고 또 가버렸어요 얼룩진 불안으로 가득 찬 하루가 시작되네요 내가 푸른 사과일 적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놓쳐버린 손과 땅거미 밀려오는 골목길을 헤매던 목메임과 불 .. 2022. 8. 4.
김점미 시인 / 행복한 도서관 외 6편 김점미 시인 / 행복한 도서관 문을 열면 연분홍 꽃잎 머금고 걸어오는 푸른 바다 봄 햇살이 꿈의 책장을 넘기면 신록의 아이들, 재잘거리던 입 감추고 조용히 서가에 둘러앉아 출렁출렁 사람의 바다를 유영하고 서 있는 사람, 앉아 있는 사람, 누워있는 사람, 말쑥한 사람, 지저분한 사람, 동그란 얼굴, 길쭉한 얼굴, 웃는 얼굴, 찡그린 얼굴, 화난 얼굴, 행복한 얼굴… 개성도 생각도 다양하여 누구도 소홀하지 못하는 방에서 각기 다른 가방 꾸리며 떠나는 여행지 여기는 세상 한켠이면서 세상 전부이고 동양이면서 서양이고 오늘이면서 내일이고 현재이면서 과거이고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모여 나른한 오후의 담소 즐기는 실명의 고통으로 쓴 축복의 시*를 재잘거리던 아이들은 느꼈을까, 아픔이면서 희망이고 지면서 다시 피는.. 2022. 8. 4.
진영심 시인 / 재와 보석 외 4편 진영심 시인 / 재와 보석 눈썹 아래 흘러내린 무망을 그만 잊고 싶은 눈동자, 겨우 당신 눈 속에 차올랐는데 문득 스미지 않는 마음, 장미 돋친 가시이다 이런 때 진정 갖고픈 터전은 레이캬비크에서 시작하는 황금고리 해안선 우리의 생애를 애써 눈여겨 바라보지 않는 곳 침묵을 비 맞듯 우두커니 서서 통째로 씹는 말들과 풀을 온종일 언어처럼 먹어치우는 양들과 표정을 꽉 다문 바다쇠오리 퍼핀들이 가득한 곳이니까 몸통을 꺾는 비바람이 불어온다, 틈만 만나면. 디르홀레이 해안가 파도에 꺾인 코끼리 바위형상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른다 시간을 오래 품어도 썩지 않는 것 비바람 사이로 확 번져오는 감정의 풍경 위로 순전해서 높아서 녹지 않던 만년설들 무언가(無言歌)를 견디지 못해 빙산 되어 녹는다 요쿠살론 유빙들 옥빛.. 2022. 8. 4.
황미현 시인 / 떨어진 별 외 2편 황미현 시인 / 떨어진 별 지구에 얽힌 실선들, 가만히 보면 모두 휘어진 모양입니다 자연스레 휘어진 모양의 국경선은 인습적이거나 아름답습니다 가령,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지구의 실선들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고정으로 머물러 있었다는 그래서 누군가 지구본을 돌리듯 지구를 힘껏 돌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휘어지거나 삐뚤삐뚤한 국경들 다시 그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라는. 그중 별을 국기의 상징으로 쓰는 나라들은 어디서 그 별을 주웠을까요 단출하게 하나만 주워 왔거나 아니면 여러 개의 별들을 일렬로 늘어 놓거나 반원으로 둘러 놓은 하얀 별, 또는 노란 별, 빨강 별 사실 하늘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주워왔을 수도 있습니다 떨어진 별들이 모인 국기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습니다 별들은 저토록 유연한 것입니다 황미현 시.. 2022. 8. 4.
송용탁 시인 / 점의 은유 외 1편 송용탁 시인 / 점의 은유 시든 꽃도 퇴고하면 나비가 찾아올까 꽃처럼 잎술을 떨어뜨리면 결정적인 문장도 걱정을 멈출 것 같아 정지를 예감한 사이는 오히려 편안했다 탄로 난 점의 위치, 그 안에 핀 하얀 침대 속 가득한 질문들 애인은 떨어진 꽃을 말아 피우고 그녀의 구석에서 조화처럼 울고 있는 나 내내 걸어온 길이 점의 반지름뿐이라면 우리의 둘레는 몇 개의 밤을 건너 왔나 반점이 나비처럼 물들고 남은 반지름을 지우는 지문들 대답의 근처에서 그만 날개를 접었다 나비는 무덤을 가져본 적도 없이 무덤을 읽고 우린 하얀 침대 위에서 선량했다 나비를 끌어당겨 부끄러운 애인의 가슴을 덮어준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환한 영역 짧은 문장을 증명하는 몸짓이 밤이었다가 어느 새 검은 보름이 되었다 깊이만 남은 점 하나 월간 .. 2022. 8. 4.
정영운 시인 / 저녁 오는 소리 외 1편 정영운 시인 / 저녁 오는 소리 바람은 바람의 말로 사람의 마을을 흔들고 가네 나무의 말들은 잎새 접고 있는 자귀나무 가지 위에 조곤조곤 떨어지네 세상의 그늘들은 그늘을 덧대 어둠이 누울 자리를 만드네 누군가는 경건한 의식같은 하품을 끝내고 창문을 닫아거네 멀리 침묵처럼 닫히는 수평선 땅거미지는 마을에 도착해서야 마음 놓고 달맞이 꽃들을 피워내는 저녁 전령 두드려 보지도 않고 건너던 돌다리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맨발 그 시려운 발을 데리고 그가 돌아오는 소리 -2011년 1월호 소시집에서- 정영운 시인 / 낭창낭창 단단히 말뚝을 박고 줄을 건 다음 당기고 밀어내기를 반복하며 줄을 조율하던 어름사니 권원태는, 줄 위에서 걷기를 반복하며 테스트하고 있던 제자에게 한마디 하였다 "출이 너무 밭아도 느슨해도 안 .. 2022. 8. 4.
조창규 시인 / 나의 장례식 외 1편 조창규 시인 / 나의 장례식 기도를 멈추는 날이 장례일이 될 겁니다 영혼이 아름다워질수록 내 육체는 야위어갑니다 며칠 째 나는 혼수상태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내리는 눈송이가 내가 처음 맛본 이유식이라면 배고픈 새들을 위해 눈밭에 모이를 뿌리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죠 이삼월이면 아직 땅속도 얼어있을 텐데 당신에게 쓴 시들이 꽃샘추위에 떨어질까 봐 새벽마다 당신을 위해 무릎으로 씨를 뿌렸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사귄지 백팔십이일 되는 날입니다 성지순례는 결코 억누를 수 없는 사랑의 의무인데, 내가 죽으면 시든 꽃을 들고 조문 와주세요 당신이 나의 뺨을 어루만질 때 신기하게도 내 눈물은 광합성으로 시듭니다 무릎이 닳고, 당신 미간의 주름도 먹구름처럼 깊어지네요 하루하루 살아가기.. 2022. 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