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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112

권성훈 시인 / 양파 외 2편 권성훈 시인 / 양파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바깥인 줄 몰라 문을 벗기면 창이 열리고 또 문으로 벗겨지는 중력 잃어버린 소문처럼 앞뒤가 섞이지도 않는 하늘 속 구름같이 통정 속 통점같이 서로 먼저 잊기 위해 눈물을 잘라내도 곧 사라질 예언은 축문도 없이 새겨지고 단단한 칼날 움켜쥔 신이라고 수화하는 눈을 떼지도 못하네 새어나가지 않는 고해성사의 부엌이여 당신과 함께했던 눈먼 몇 겹의 고백은 세기도 전에 눈물뿐이라서 세다가 돌아갈 방향을 잊으라 생이 새어 버렸네 계간 『시와 경계』 2021년 겨울호 발표 권성훈 시인 / 가발의 감정 한번 가면 아주간다는 아주대병원 사거리 성형외과 백 원장 아버지는 벗겨진 머리를 시멘트 칼처럼 빗고 다녔던 미장공이었다 5남매 기르며 실밥처럼 튀어나온 몇가닥 머리카락 빠질세라 .. 2022. 8. 11.
허진아 시인 / 낙화 외 2편 허진아 시인 / 낙화 의사가 나가자 남자가 소리친다 등산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는 게 낙인데 술을 끊으라니 살아도 죽은 목숨이라고 살아도 죽은 목숨의 남자가 있다 참척의 유골함을 가슴에 안고 허깨비로 사는 아버지가 있다 낙이 없어 목숨을 끊은 4월의 아버지가 있다 허진아 시인 / 피의 현상학 나보다 먼저 거울에 있는 나는 누굴까 비밀은 피야 피를 읽을 줄 알아야 해, 피에는 비어있는 페이지가 없지* 불만으로 꽃을 세는 건 슬픔 쪽으로 흐르는 피 때문일까 하나, 둘, 셋..... 시간의 멍 자국, 재스민 보라를 오래 쓰다듬다 행운목이 있는 곳 세상 안일까 바깥일까 행운이 운명이라면 내 피의 대가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나를 싸고 있는 시간들. 이 슬픔 내 것일까 내 피에 펄펄 살아있는 페이지 [내가 선택.. 2022. 8. 11.
강주 시인 / 점묘 외 1편 강주 시인 / 점묘 하나의 점은 꽃이 피기 위해 시작되지. 첫 번째 꽃이 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점들이 필요할까. 한순간도 쉬지 않고 발생하는 점. 점, 네가 떨어뜨린 꽃잎과 꽃잎이 지녔던 너는 또다시 반복되겠지. 길을 잃은 걸음조차 새로운 의태일 지 몰라, 나뭇잎 모양으로 매달린 새를 봐 몇 개의 점이 갉아먹은 나뭇잎 꽃은 떨어지기 위해 필사적이야. 마치 그 순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맴 돌면서 너를 지탱하고 다시 점이 되려고 원점을 향하지. 하나의 점이 또 하나의 점으로 떼어지고 꽃은 만발해. 꽃에 파묻힌 너를 봐. 상상 속의 너는 스스로 펼쳐지는 씨앗이야 강주 시인 / 오늘은 구슬 아득히 먼 사람을 이야기할 때 나는 눈을 감고 깊은 바다 속으로 나를 빠뜨린다. 굵은 빗줄기가 하나둘 바다에 몸을 .. 2022. 8. 11.
정미소 시인 / 이사의 달인 외 1편 정미소 시인 / 이사의 달인 하느님은 이사철도 아닌데 짐을 꾸리라 한다. 너구리 근성이 금싸라기 땅 지구에 붙박이로 눌러앉을까 봐. 어느 해 봄은 오동나무 관값을 올리고 어느 가을은 달동네에 화장터를 들였다. 윤달맞이 안동포 황금수의도 개똥밭 떠나면 그뿐, 등 떠밀려 사는 목숨 세간도 없어요 층간소음 부르고 장맛비에 침수가 대박입니다. 하느님, 달인이 되었으니 복 한 채 지어주세요. ≪시와사람≫ 2020 여름호 정미소 시인 / 산속의 무덤집 문을 열면, 도랑물 소리가 두고 온 아들의 연예인 이야기 소리로 들리고 늦은 밤엔, 남편의 여자가 찾아와 아이 낳겠다 소란 피우지 않아 좋다고 한다. 너는 나 몰래 자궁에 딴 주머니를 찼었구나. 집 자랑을 꼭꼭 눌러 바람개비를 접는다. 산속 무덤집이 바람개비 꽃궁전이.. 2022. 8. 11.
김명옥 시인(화가) / 가면성 우울증 외 3편 김명옥 시인(화가) / 가면성 우울증 편백나무 베개를 베고 누웠어요. 향기로운 꿈이라도 꿀까봐서요. 활짝 핀 꽃무늬 이불도 덮었어요. 꽃밭에서 노니는 꿈이라도 꿀까 봐서요. 햇살은 휘청거리고 시간만 노릉노릇 익어 가는데 눈물 젖은 손수건은 저 홀로 신음을 삭히네요. 어설펐던 선택들이 머리 풀고 찾아와 목을 조르는 밤 뚜껑 열린 채 나뒹구는 물감들처럼 혼절한 영혼은 아직 경련 중입니다 약도 없는 병에 걸렸다고 소문이라도 낼까요? 기별 없는 희망을 덮어쓰기 할까요? 생존법은 까마득히 까먹었고요. 중독성 있는 이름만 허공에 맴돕니다. 오늘에 접신 된 가면 들이 손짓하네요. 어떤 가면으로 여러분들을 만나러 나갈까요? "네티,네티"* 이름을 얻지 못한 생의 순교자를 목소리만 귀를 두드립니다. *네티, 네티 : (.. 2022. 8. 11.
김명옥 시인(부산) / 벽화마을 외 9편 김명옥 시인(부산) / 벽화마을 저 무수한 계단이 끝나는 곳은 달이 걸려있겠지 잃어버린 마을이 환생되었다는 소문을 따라 골목길을 몇 번이나 접었다가 펴니, 잉어가 푸른 물줄기를 가르며 솟구쳐 오르는 강물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풍선을 잡고 곧 날아오를 듯한 아이들, 꽃잎 위에 앉은 소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오래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늘진 쪽창 밖에는 별이 무럭무럭 자랐다 기적같이 붓이 지나갈 때마다 신화가 탄생하고 생기 없던 동네사람들은 들뜨기 시작했다 박물관은 놓친 기억들을 불러 모으고 골목어귀 커다란 천사날개를 어깨에 달자 행복한 미소가 훨훨 날아 단풍 든 숲 벽화로 들어앉는다 김명옥 시인(부산) / 네일, 내일 접힌 신문지를 활짝 펼쳐 놓고 돋보기 쓴 아들이 노모의 손톱을 깎는다 까마.. 2022.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