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가톨릭교회사327

[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2) 중국교회와 조선교회 [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2) 중국교회와 조선교회 천주교 탄압 극복하고 선교사제 조선 입국 전진기지 역할 가톨릭신문 2021-09-12 [제3261호, 18면] 조선교회 관할 맡은 북경교구 주문모 신부 조선으로 파견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후 전교 나선 파리 외방 전교회 만주·상해 등지에 거점 두고 조선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들어와 친척과 지인에게 전교하고 세례를 줌으로써 조선 천주교회가 성립됐다. 이후 1789년과 1790년 2차에 걸쳐 조선 신자들이 윤유일(尹有一)을 북경에 파견함으로써 조선교회가 자생적으로 생겨난 사실이 중국교회는 물론 로마 교황청에도 알려지게 됐다. 사제의 전교 없이 자생적으로 조선교회가 성립한 것은 세계 교회사에서 유.. 2021. 9. 11.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7. 제주도와 추자도의 모자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7. 제주도와 추자도의 모자 황사영 순교 이후 부인은 제주도, 두 살 아들은 추자도로 유배 가톨릭평화신문 2021.09.12 발행 [1629호] 뿔뿔이 흩어진 가족 1801년 11월 5일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부인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현으로, 2세 난 아들 황경한(黃景漢, 1800∼?)은 추자도로 각각 노비가 되어 떠났다. 숙부 황석필과 집안의 종들도 함경도 등지로 끌려가서 황사영의 아현동 식솔들은 풍비박산이 났다. 정명련은 제주도 유배 길에 배가 추자도에 들렀을 때 두 살배기 어린 아들을 섬에 내려놓아야 했다. 이것으로 모자는 이승에서 다시 얼굴을 맞대지 못했다. 「사학징의」의 기록에 따르면 황경한은 서울을 떠.. 2021. 9. 10.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52) 나폴레옹의 대관식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52)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대관식에서 직접 왕관을 쓰는 나폴레옹, 교황은 허수아비일뿐 가톨릭평화신문 2021.09.05 발행 [1628호] 이번에는 잘 알려진 작품을 소개한다. 여전히 나폴레옹과 비오 7세 교황의 관계는 긴장 국면에 있었다. 지난 회에서 살펴본 ‘1801년의 종교협약’은 나폴레옹의 일방적인 파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1803년 4월 8일 프랑스 정부의 ‘부속 법령’으로 결국 무효로 끝났다. 그러고도 나폴레옹은 1804년부터 자신의 공식 황제 즉위식을 위해 교황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비오 7세 교황은 망설였다. 그러나 파리 시민들을 생각하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있을 즉위식 이후 파리 방문을 4개월 한다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황제의 즉위.. 2021. 9. 5.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6. 황사영은 역적인가?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6. 황사영은 역적인가? 광적인 종교 탄압에 맞서 오로지 천주 섬기는 자유 청원 가톨릭평화신문 2021.09.05 발행 [1628호] 1㎝에 세 글자씩 쓴 1만 3384자 황심은 8월 23일 서울로 왔다가 이튿날 제천으로 떠났다. 그는 아마 8월 26일경에 배론에 도착했을 것이다. 황심의 제천행은 황사영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간의 교회 소식을 전했다. 황사영은 자신이 그간 토굴 속에서 준비한 종이에 쓴 백서의 초고를 황심에게 보여주었다.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행차 편에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글이었다. 황심을 통해 신부의 최후에 대한 전언을 들은 황사영은 보완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황심이 말미를 두고 다시 오겠다며 길을 떠났다. 황사영은 내용을 추가해.. 2021. 9. 4.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51) 1801년의 종교협약 비유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51) 조셉 셀레스틴 프랑수아의 ‘1801년의 종교협약 비유’ 프랑스 혁명 정부의 기세에 밀려 불리한 조약을 맺는 교황청 가톨릭평화신문 2021.08.29 발행 [1627호] ▲ 조셉 셀레스틴 프랑수아, ‘1801년의 종교협약 비유(Allegory of the Concordat of 1801)’, 1802년, 프랑스 말메종 성(城) 국립박물관. 1799년 8월 29일 비오 6세 교황이 프랑스 디종에서 선종한 후, 추기경회의 의장 주세페 알바니 추기경이 소집한 콘클라베는 로마에서 열리지 못했다. 프랑스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가 지원해 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베네치아에서 열렸다. 그러나 콘클라베가 열리기도 전에 로마의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 그해 9월 19일.. 2021. 9. 1.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5. 배론의 토굴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5. 배론의 토굴 교우촌 토굴에서 기도와 강학·일기 쓰며 절망의 시간을 보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08.29 발행 [1627호] 배론 가는 길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황사영이 2월 15일쯤 서울을 떠나 경상도 예천에 머물다가 강원도 접경으로 옮겼고, 이후 제천 배론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사학징의」 중 장덕유(張德裕)의 공초 중에 비슷한 내용이 있다. 누각동에 사는 신자 김국빈(金國彬)이 3월 20일쯤 장덕유를 찾아왔는데, 자신이 2월 중순경 여주에서 김한빈과 우연히 만났더니, 그가 상복 입은 사람을 데리고 예천으로 내려간다고 했다는 전언이었다. 또 배론 옹기점 주인 김귀동(金貴同)이 자신의 공초에서, 2월 그믐께 김한빈이 이상인(李喪人)을 데리고 왔다.. 2021. 8. 30.
[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1) 황실 궁정화가 카스틸리오네 [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1) 황실 궁정화가 카스틸리오네 회화로 전한 ‘주님의 사랑’ 그 어떤 수식어보다 강렬했다 가톨릭신문 2021-08-29 [제3259호, 18면] 황제 3명과 쌓은 50여 년 우정 신앙의 관념을 예술 통해 소개 금지령으로 끝내 성공 못했지만 닫혀 있는 전통화법 극복하고 하느님 나라로 시선 돌리게 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지인들은 ‘목수의 아들’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기득권자들은 ‘선동꾼’이라며 두려워했다. 더러는 ‘요한 세례자’라고, ‘엘리야’라고,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당신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이는 베드로다. 그의 고백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 교회를 세웠고, 지켰고, 넓혔다. 카스틸리오네 ‘백준도’(百駿圖, 1728.. 2021. 8. 28.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선교와 사목 영성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선교와 사목 영성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헌신적인 노력과 열성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열성은 복음 선포자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갖는 열성은 그들에게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반대로, 열성이 부족할 때는 무관심과 나태에 빠져 복음 선포에 실패하고 만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박해의 고난과 역경을 겪을 때마다 헌신적인 노력과 열성으로 극복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조국의 모습에 매우 아쉬워하며 조선에 복음이 전해져 동포들이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진정으로 염원했다. 그는 1844년 중국에서 입국 기회를 살피다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 2021. 8. 26.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50) 성 베드로 광장에 차려진 조국의 제단’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50) 펠리체 자니의 ‘연맹 축제를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차려진 조국의 제단’ 로마까지 삼켜버린 프랑스 혁명의 불길 가톨릭평화신문 2021.08.22 발행 [1626호]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중요한 타도 대상이 된 가톨릭교회와 프랑스의 혁명 정부 간 분위기는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여태껏 맏딸로 여겼던 프랑스의 반항을 견뎌야 했다. 많은 가톨릭 신자가 폭도들의 괴롭힘과 위협을 받았고, 생명의 위험을 느낀 프랑스 귀족들은 로마로 피신했다. 프랑스에서 교황청으로 피신한 가톨릭 신자는 약 6000명에 이르렀다. 혁명 정부, 가톨릭 탄압 1790년 7월 12일, 프랑스 의회는 새 혁명 정부에 ‘성직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에게 충성 서약을 의무적으로 하도록 했고,.. 2021. 8. 21.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4. 황사영의 도피를 도운 사람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4. 황사영의 도피를 도운 사람들 신유년 체포령 내리자 상복 입고 김한빈과 배론으로 피신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08.22 발행 [1626호] ▲ 황사영이 신유박해를 피해 상복을 입고 성묘 가는 행색을 꾸려 배론으로 피신하던 중 경기도 평구에서 김한빈을 만나 동행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한꺼번에 터진 제방 신유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조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11월에 국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12월 17일에 최필공이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12월 19일 새벽, 최필제의 약방에 모여 기도하던 사람들이 기찰 중이던 포졸들에게 적발되었다. 새해 1월 10일 정순왕후는 천주교인의 전면적 색출을 위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의 연좌제 실시를 윤음으로 선.. 2021. 8. 20.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3. 황사영의 애오개 교회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3. 황사영의 애오개 교회 사당 허물고 성물 제작소 운영하며 조선 교회 본당 역할 가톨릭신문 2021.08.15 발행 [1625호] 손이 귀한 명문가의 유복자 황사영은 명문인 창원 황씨 판윤공파의 후예였다. 황사영의 7대조 만랑공(漫浪公) 황호(黃, 1604~1656)는 대사성을 지낸 인물이었고, 황사영의 증조부 황준(黃晙, 1694∼1782)은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를 지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든 국가 원로였다. 그의 아들 황재정(黃在正, 1717∼1740)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떴다. 종가가 절손되자, 황준은 황재정이 죽은 지 7년 뒤에 태어난 7촌 조카 황석범(黃錫範, 1747∼1774)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종가의 봉사손.. 2021. 8. 18.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선교와 사목 영성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선교와 사목 영성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착한 목자의 사랑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근본적으로 ‘사랑의 정신’이 요구된다고 가르친다. 그 사랑은 ‘착한 목자의 비유’(요한 10,7-18 참조)에 나오듯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헌신을 그 이상으로 삼는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실현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신자들에게 보낸 옥중 서한에서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드러내었다. 그는 서한에서 신자들을 “우리 사랑하올 제형들”이라고 부르는데, 이 표현은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신자들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사랑하는 마음 잊지 못하는 신자들”을 향해 “모든 신자들은 천.. 2021. 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