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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212

김은상 시인 / 환유(換喩) 외 1편 김은상 시인 / 환유(換喩) 꿈 밖의 나무들 환해지는 봄날입니다. 나는 오늘도 죽지 못해서 울울창창 흘러오는 숲을 뒤척입니다. 아직은 놓지 못한 체온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했던 또 용서하지 못했던 한밤의 발자국들, 내 몸속으로 음각한 우물입니다. 어제는 꿈속에서 자살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어릴 적 모습 그대로 하얗게 흔들렸습니다. 너무나 반갑고 그리웠던 이름을, 나는 왕관앵무새라 부르고 말았습니다. 소녀가, 소녀가 웃고 있었습니다 왕관앵무새가, 왕관앵무새가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훨, 훨, 날아가 버렸습니다. 멀리 무지개 속에서 들려오던 시냇물소리, 웃으면서 깬 아침이 축축한 꿈결이어서 오늘은 인연을 환유라 칭하겠습니다. 실어증을 앓는 우울들이 골목 여기저기로 떠내려갑니다. 내가 흘러.. 2022. 8. 2.
홍계숙 시인 / 다정한 간격 외 1편 홍계숙 시인 / 다정한 간격 겨울나무 그림자는 간격을 재는 줄자 천년을 한 자리에 묶여 사는 나무들은 제 키를 알고 있지 한겨울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걸으면 볼 수 있네 체중이 가벼워진 나무는 발치에서 미끈한 줄자를 꺼내어 앙상한 우듬지 빈 둥지와 저쪽 둥지와의 간격을, 굴참나무 껍질 속 사슴벌레들 겨울잠과 봄의 간격을, 가로수 길을 걷는 연인들 입술의 간격을 차가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체온까지 재고 있는 것을 종종걸음 햇살에 제 키를 맞추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줄자를 늘였다 당기며 너에게서 나에게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슬금슬금 아침에서 저녁까지 해마다 나무의 키가 쑥쑥 자라는 건 그 줄자 때문이지 뒤꿈치를 들고 온종일 하늘바라기에 겨울 해가 저무는 겨울은 당신과 나의 간격을 재기에 좋은 계절, 너무.. 2022. 8. 2.
정공량 시인 / 청소 외 1편 정공량 시인 / 청소 휴지는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지만 흩어진 우리 마음 주워서 어디에 버리나 거꾸로 누워 있는 세상 그 누가 청소하나 비 오다 그치고 나면 환한 세상 이룬다지만 가득 채운 쓰레기통도 비우면 그만이지만 마음에 담은 쓰레기는 누가 알고 청소할까 -2010 『시조 21 하반기 호』, 정공량 시인 / 너를 사랑한다 말하고 싶을 때 너를 사랑한다 말하고 싶을 때 하늘은 몹시도 푸르러 내 마음처럼 출렁거렸습니다 너를 사랑한다 말하고 싶을 때 노을은 노을대로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진실로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 말하고 싶을 때 바람 흐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흐르는 시간만 바람 속에 지워졌습니다 어느 먼 내일, 또 그 후에라도 너를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을 하고 싶을 때 그때 내 가슴만 타 들.. 2022. 8. 2.
임경묵 시인 / 꽃피는 스티로폼 외 1편 임경묵 시인 / 꽃피는 스티로폼 봄바람은 불고 벚꽃은 흩날리고 스티로폼 조각은 골목을 굴러간다 피자 배달 오토바이가 스티로폼 조각을 툭 치고 골목 속으로 사라진다 떨어져 나간 스티로폼 한 귀퉁이가 골목을 굴러간다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스티로폼 조각도 핑그르르 돌다가 골목을 굴러간다 피자 배달을 마치고 골목을 나오던 오토바이가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스티로폼 조각을 다시 정면으로 밟고 지나간다 스티로폼이 파삭 부서진다 그 속에서 스티로폼 흰 알갱이들이 무수히 태어난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오토바이 뒤를 좋다고 따라가는 스티로폼 흰 알갱이들...... 봄바람은 불고 벚꽃은 흩날리고 스티로폼 흰 알갱이들이 일제히 과속방지턱을 통통통 뛰어넘어 골목 밖으로 굴러간다 - 《시인동네》 2019년 10월호 임경묵 시.. 2022. 8. 2.
박완호 시인 / 공중의 완성 박완호 시인 / 공중의 완성 더는 날아오를 까닭을 찾지 못할 때 새는 문득 수직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던 우듬지의 고개가 아래쪽으로 젖혀질 무렵, 새는 저 먼 바닥으로부터 솟구치는 공기의 텅 빈 속내가 불현듯 궁금해지는 것이다. 날개를 흔들어 댈 때마다 양쪽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지는 까닭을 나뭇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순간 발바닥에 짜릿하게 와 닿는 결별의 감각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바닥이 가까워질수록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처럼 어디서 가늘게 떨고 있을 벌레들의 숨결을 짚어가며 새는 한순간에 허공을 가로지른다. 공중은, 꿈꾸는 한 마리 새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계간 『시와 편견』 2021년 겨울호 발표 박완호 시인 충북 진천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2022. 8. 2.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179. 복음과 사회교리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179. 복음과 사회교리 (「간추린 사회교리」 410항) 갈등 해결 위한 올바른 가치관은 사회가 걸어갈 길이 된다 가톨릭신문 2022-07-31 [제3305호, 20면] 갈등과 대립 푸는 해법에 있어 어떤 가치로 다루는지가 중요 인내하며 책임감으로 연대할 때 상생·평화의 길로 나갈 수 있어 “몸무게가 22톤인 암컷 향고래가 500㎏에 달하는 대왕오징어를 먹고 6시간 뒤 1.3톤짜리 알을 낳았다면 이 암컷 향고래의 몸무게는 얼마일까요? 정답은 ‘고래는 알을 낳을 수 없다’입니다. 고래는 포유류라 알이 아닌 새끼를 낳으니까요. 무게에만 초점을 맞추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핵심을 봐야 돼요.”(‘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회) ■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사태 무엇이든.. 2022. 8. 2.
한상권 시인 / 낙관 외 1편 한상권 시인 / 낙관 주산지에서 풍경화를 그리다가 왕버들나무처럼 온몸이 젖어 있다가 야송미술관 옆 넓은 밥집 마당으로 옮겼다 송소고택의 헛담에 대해 이야기하며 잠시 단풍과 단풍 사이를 붉게 거닐었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진 창가에 앉아 점심을 먹는 것인데 갑자기 작은 새 한 마리가 가을 식당 통유리에 부딪혀 기역자로 꺾였다 누군가 단지 유리창 밖의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어느 우주에선가 온몸을 던져 지워지지 않는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옹호했지만 텅 빈 구두로 가득 찬 밥집을 걸어 나오면서 발 앞에 떨어진 단풍잎 하나를 주우면서 온몸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닿지 않는 길 위에서 문득 가을이라는 유리 속에서 새와 세계와 나의 관계를 보는 눈을 잃어버렸다 한상권 시인 / 삼청동 식빵집 실습생 빵의 기본은 식빵 밀가.. 2022. 8. 2.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40) 공부하는 신앙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40) 공부하는 신앙 – 두 번째 이야기 하느님 앞에서 자기 삶과 신앙 돌아보는 공부 모임 필요하다 가톨릭신문 2022-07-31 [제3305호, 14면] 다양한 공부 소모임 활발해야 본당 공동체에 활력 줄 수 있어 속지주의적 원칙 고수하지 않고 취미와 취향 등 동질성 고려해야 ■ ‘신학서원’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 신자들과 함께 공부 모임을 하고 있다. 지난 5월부터 두 그룹의 신자들과 한 달에 한 번, 공동 사제관 빈방을 이용해서 진행하고 있다. 처음의 내 계획은, 신학서원과 신앙 공부 모임(혜연공동체)을 별개의 형태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신학서원은 내가 직접 개입해서 함께하는 형식으로, 혜연공동체는 자료만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신학서원.. 2022. 8. 2.
양현주 시인 / 부재중 외 1편 양현주 시인 / 부재중 손과 손이 마주친 순간, 체온은 낯익은 고기압이 된다 상냥한 표정을 가진 살결에서 말없이 번져나가는 상서로운 기운 저기, 왼편만 있는 사람이 가파른 산마루 오르고 있다 황망히 강물을 건너 숲으로 뛰어간 오른편이 비너스를 붙잡고 간호한다 땅속에 팔을 심어놓은 아프로디테가 눈물을 뿌려주는 숲 덩굴 어깨가 면벽을 주무른다 착한 수지침 하나가 슬며시 나무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와 애끓는 마음을 찌른다 성치 못한 몸이라도 괜찮다 바람이 허공을 훑으며 손사래를 친다 삐딱한 세상, 정면을 보란 듯이 가문비 우는 소리가 집 밖으로 껍질을 내민다 숲은 대수롭지 않은 듯 하냥 웃는데 스친 온기를 잊지 못한 지금 양현주 시인 / 물고기자리 별 마지막 페이지에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죽어 나오.. 2022. 8. 2.
안차애 시인 / 자산玆山 안차애 시인 / 자산玆山 - 검정의 길 홍어가 홍어의 길을 알고 ​가오리가 가오리의 길을 알듯 ​바다가 검정의 색을 알고 ​검정이 바다의 농도가 되는 것일까 ​흑백 앵글 가득히 검정이 밀려올 때 ​바다의 발걸음은 우선과 멈춤 사이에 있다 ​순간의 산맥처럼 굳어지거나 ​찢어진 돌의 자세로 숨을 죽인다 ​검정은 출렁거려도 액체가 아니라서 ​자산에 묻는다 ​약용과 약전의 차이처럼 ​검정을 밭으로 삼는 자의 어족魚族들이 쏟아지고, ​비린내가 검정의 표면을 찢듯 ​물컹한 방향에서 지느러미가 돋아나듯 ​가오리는 가오리의 길을 연다​ ​청어는 청어의 노래를 부른다 ​섬의 뼈가 물결문양으로 촘촘해지고 ​지극과 지독 사이에서 ​길을 묻지 않는 자의 길이 탄생한다 ​처음 보는 검정이다 계간 『학산문학』 2021년 겨울호 .. 2022. 8. 2.
서정연 시인 / 친절하게도 외 1편 서정연 시인 / 친절하게도 사랑한다고 말해서 너를 따라갔다 너는 때로는 삶처럼 신중하고 민첩하고 비를 맞은 듯 또한 축축하기도 했다. 친절하게도 처음으로 거웃이 선명한 성인용 잡지를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어느 날은 친절하게도 상영관 벽에 나이 이른 여자를 세차게 밀치며 영화 속 흥분한 사내처럼 코피를 흘렸다. 친절하게도 너의 불룩한 아랫도리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해주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해준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버림받아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무서웠다. 엄마는 오지 않았다. 죽은 형 이야기를 할 때는 슬퍼 보여서 너를 따라 무덤에 갔다. 너는 친절하게도 무덤가에서 손목시계를 보며 여자의 치모를 헤집고 정점에 도달하는 시간을 쟀다. 묏등의 띠는 삐비처럼 보드라운 여자의 .. 2022. 8. 2.
박찬세 시인 / 가로수 외 4편 박찬세 시인 / 가로수 한날한시에 심은 나무들도 제각각 다른 무늬의 그림자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한날한시에 부는 바람에도 나무들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떨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에 매달려 떨고 있는 빗물에도 방울방울 다른 것이 어려 있겠습니다 박찬세 시인 / 체위의 진화 오른손만 한 것도 없지, 올무에 걸렸다 풀려난 개는 벗겨진 뱃가죽을 핥고 오른손은 개를 부른다 오른손 밑으로 개의 머리가 지나간다 눈에 흰자가 보이도록, 여러 차례 개는 상처를 핥다가 거기까지 핥고 있다 거기까지 상처였다는 듯 진부해, 누군가는 왼손을 말했지만 어색한 것이 새로운 것일까 오른손은 체위에 대해 골몰한다 너는 잠들어 있고 나는 너를 떠올리며 오른손만한 것도 없어, 읊조리는 새벽 발버둥칠수록 조여드는 올무 개는 핥는다, 배어 나오는 .. 2022. 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