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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312

배세복 시인 / 밤의 저수지 외 1편 배세복 시인 / 밤의 저수지 달의 저편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야! 당신이 말했죠 밤은 깊어가고 우린 저수지 근처에 있었죠 뒤편 저쯤에다 커다란 거울을 쏘아 올리면 돼! 하늘에는 보름 가까운 달이 떠 있었죠 나도 당신 따라 달을 올려다봤죠 언제나 같은 얼굴만 보여주는 달의 낯, 당신처럼 말이죠 다시 귀 기울이는 내게 당신은 말이 없었죠 한참 지나도 입을 열지 않는 당신, 저수지를 보고 있었죠 물낯에 환하게 떠오른 달 당신이 더 잘 알 거예요 밤마다 당신은 내게 저수지를 만들어주니까요 함께 걷던 교각 아래 푸른 물은 넘쳐버렸고 소매를 붙잡던 그 밤의 악다구니들도 녹아 내려요 또 달이 떠올라요 오늘도 앞면만 보여주네요 당신처럼 늘 웃고 있는 달, 거울을 쏘아 올리는 대신 나는 저수지로 뛰어들죠 물낯을 .. 2022. 8. 3.
김령 시인 / 실종 외 3편 김령 시인 / 실종 ​ 신천댁이 사라졌다 사흘 전까지 웃으며 고기도 드시고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고 하지만 십수 년 전 영감이 사라지고 나서 아니 그 이전 고물고물한 아이들의 젊은 엄마일 때 설거지물을 텃밭에 뿌리러 나올 때면 가끔씩 검은 머리와 눈썹이 흐릿해지는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과 그 친구들 대청마루에 북적일 때면 단박에 선명한 색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간격이 너무 멀어 처음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새날을 헐어낼수록 새 밤을 흘려보낼수록 온몸의 빛깔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홀로 빈 집에서 벽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마당 들어서며 부르면 느릿느릿 걸어 나오곤 했다 형체가 사라지고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날이 늘어갔다 명절이나 휴가철 자식들 들르는 날엔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옷감의 물이.. 2022. 8. 3.
[길 위의 목자 양업] (30) 오두재에서 보낸 열다섯 번째 서한①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0) 1858년 10월 3일 오두재에서 보낸 열다섯 번째 서한① “조선의 신자들을 위해 많은 사제를 보내주십시오” 가톨릭신문 2022-07-31 [제3305호, 12면] 최양업과 함께 사목했던 6명의 선교사 과중한 업무로 건강 악화돼 목숨 잃기도 잠시 천주교 정책 온건해지는듯 했으나 박해령 존속되며 교우들 괴롭힘 당해 1864년 조선 해외선교 사제로 파견되는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 4명의 모습을 담은 샤를 드 쿠베르탱의 ‘선교사들의 출발’.(1868년 작) 왼쪽부터 위앵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 이들 4명은 모두 병인박해로 순교, 성인 반열에 올랐다. 1850년 1월 전라도 지역에서 사목순방을 시작한 최양업은 경기도·충청도·강원도.. 2022. 8. 3.
허청미 시인 / 선운사 동백나무 허청미 시인 / 선운사 동백나무 오백살 여자가 아이를 뱃다고 노산老産의 산통이 온 산을 흔들거라고 동박새는 제 부리를 콕콕 쪼아 무성한 소문을 전송하네 분만을 준비하는 동백 숲 속 앙칼진 꽃샘바람이 이월의 짧은 꼬리를 뜯고 있다 늙은 임부는 진통이 와 몸을 떨고 언 산방에 불을 지피는 오후의 햇살 오! 눈부셔라 저 선홍의 무녀리 산방 문이 열리네 선운사 뒤란에 불이 붙겠네 동백꽃불 속 어디쯤 어머니 꽃등 하나 켜고 계실 것도 같은 환생의 씨앗 품고 모질도록 동백나무는 긴 겨울밤 깨어있었다 허청미 시인 경기 화성에서 출생. 이화여대 교육심리학과를 졸업. 2002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으로 『꽃무늬파자마가 있는 환승역』(리토피아, 2008)가 있음. 2022. 8. 3.
권선애 시인 / 불편에게路 외 1편 권선애 시인 / 불편에게路 편안대로大路 벗어나 불편에게로 갑니다 자동화된 도시에서 손발이 퇴화될 때 발밑은 물관을 따라 실뿌리를 뻗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가 풀 죽은 빌딩 숲은 낯선 대로 익숙한 대로 껍질만 남긴 채 별들의 보폭을 따라 좁은 길을 걷습니다 좋을 대로 움트는 불편을 모십니다 어두우면 꿈꾸는 대로 밝으면 웃는 대로 낮과 밤 시간을 일궈 내 모습을 찾습니다 권선애 시인 / 가시 달린 나무는 독이 없다는데 오래전에 잘라 놓은 엄나무 가지에 손가락을 찔렸다 썩은 가지에도 안간힘은 남았는지 생살을 찌른다 툭 분지르다 찔린 나를 조롱이라도 하듯 손가락 깊이 가시는 아픔을 새겨 놓는다 가시 달린 나무는 대게 독이 없다는데 옆에만 있어도 당신의 눈빛에 온몸이 따끔거린 적 있다 당신의 정면에는 거짓말을 찍어.. 2022. 8. 3.
채종국 시인 / 시선 외 1편 채종국 시인 / 시선 수족관에 우럭 한 마리 헤엄을 친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는 듯 넙치에 등을 기대어 생각의 끝을 흔들고 있다 곧 있을지 모를 피가 튀는 공포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고 다섯 살 꼬마 같은 눈망울을 지느러미 삼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흐릿한 물속을 한시도 바로 보지 못하고 이마를 찡그린다 사시斜視 같은 시선으로 살아온 시간을 거꾸로 오른다 물고기로 살았을 저만의 긴 시간이 눈동자에 묻어 있다 어쩌면 가끔 내가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내 회한의 시간과 지금 녀석의 시간이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헤친 물결 속 유리 같은 침묵 기울어 가는 시간만큼 잘려 나가는 속살 내가 같잖은 철학에 이를 때 녀석은 죽음에 닿는 시간 서로 다른 시선이 순간, 같은 곳에 머문다 무.. 2022. 8. 3.
최태랑 시인 / 뒷사람 외 1편 최태랑 시인 / 뒷사람 흰 모시적삼 아버지 중절모에 팔자걸음이 앞서가고 누런 베적삼 어머니는 열무 단을 이고 따라간다 힐끗 돌아보며 왜 이리 더디냐고 타박하던 아버지 한껏 치장한 젊은 며느리 깃털 같은 손가방 들고 아들은 아이 안고 기저귀가방도 들었다 뒤를 보며 늦었다고 짜증내는 며느리 힘든 것은 언제나 뒤쪽에 있다 - 시집 『물은 소리로 길을 낸다』(천년의시작, 2015) 최태랑 시인 / 정글戰 퇴직금 털어 피자집을 차린 부부 대박을 꿈꾸며 정글 속으로 갔다 귀를 쫑긋 세우고 프랜차이즈 전술을 배운다 이 정글의 터줏대감은 한자리에 십팔 년, 수천 마리 닭모가지를 비틀어 장작불을 지핀 노부부, 산전수전 다 거친 백전노장 좁은 땅 한 달에 칠천 명이 지원하여 오천 명이 도태되는 전쟁터 열에 일곱은 삼개월안.. 2022. 8. 3.
이미산 시인 / 다뉴브강의 신발들⁕ 외 3편 이미산 시인 / 다뉴브강의 신발들⁕ 우리가 버린 것들의 기분을 다 모아도 저 어처구니에 닿지 못하리 엄마는 모든 버려지지 않으려는 고집을 모아 아이를 끌어안았으니 남겨진 신발의 용도란 소용없는 것들의 기록 역사를 일으켜세우는 기록이 있고 발가락을 숨기는 예의바른 기다림도 있지만 신발은 사실적인 이별을 예감하진 못한다 용서도 없이 멈춰버린 심장처럼 이정표가 지워지면 처음을 가리키는 구두코 몸이 사라져도 중심을 기억하는 뒤축 꿈인 듯 농담인 듯 사라진 발을 찾는 신발들의 아우성 끌어안은 발자국들 지워질까 강물은 영영 잠들지 못한다 * 나치군에 학살된 유태인들을 위하여 애도의 징표로 헝가리 다뉴브강가에 조각된 신발들. 이미산 시인 / 수건의 비망록 내가 닦아줄 수 없는 너의 물기, 그때 우리의 포옹은 길어 몸.. 2022. 8. 3.
강유환 시인 / 늦은 저녁에 외 2편 강유환 시인 / 늦은 저녁에 급작스레 멀리서 또 기별이 왔다 침팬지나 코끼리도 까마귀나 어치도 동족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글을 읽고 있었다 올해만 해도 벌써 가슴 떨리는 네 번째 소식 태어남보다는 온통 떠나가는 것 일색이어서 오래 울리는 벨이나 떨리는 숨소리로 짐작하고도 애써 다른 이야기로 에두르지만 결국 그 자리 연 맺은 이들과 느루 속내 한번 못 나눴는데 다들 극단적 방식으로 근황을 기척해 온다 시위 주동자로 무기정학당해 졸업이 늦은 이는 월급 털어 넣던 섬으로 출근하다 배가 뒤집혔고 누구보다도 좋은 시대를 꿈꾸며 살던 이는 유서 한 장 없이 십오 층에서 낙하해 버렸다 편한 잠 한번 안 자고 무료 봉사 일삼던 친구는 단단히 뿌리내린 병의 숙주가 되었고 비정규직으로 맞짱 뜨며 강하게 살던 사촌은 퇴근길 .. 2022. 8. 3.
신지혜 시인 / 내가 고맙다 외 1편 신지혜 시인 / 내가 고맙다 자기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해본 적 있으신지요 애썼다 고맙다 말해본 적 있으신지요 자신을 격려하고 등 토닥여본 적 있으신지요 자신에게 두 무릎 꿇고 자신에게 절해본 적 있으신지요 누가 뭐래도 자기 자신만큼 가까운 베스트 프랜드는 없지요 병실에 누운 사람들이 가장 먼저 후회하는 것, 자신을 사랑할 걸 그랬다고 자신을 공경할 걸 그랬다고 자신에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 걸 그랬다고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 걸 그랬다고 나만큼 나를 아는 사람 또 지상에 보셨나요 내 육신에게 늘 고맙다는 칭찬 한 마디 해준 적 없어 내 심장아, 위장아, 두 팔다리야, 애썼다고 난생 처음 고백하였습니다 애쓴 나의 뿌리야 고맙다 내가 나를 으스러지게 힘껏 껴안았습니다 신지혜 시인 / 밥 밥은 먹었느냐 사람.. 2022. 8. 3.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179. 사회생활 참여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79. 사회생활 참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97~1927항) 우리가 공권력에 저항해도 될 때는? 가톨릭신문 2022-07-31 [제3305호, 20면] 공권력 따라야 할 의무 있지만 인간 존중·사회 안녕 저해하면 공권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어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명동본당 주임이었던 김병도 신부가 최루탄을 쏜 것에 대해 경찰에게 항의하고 있다. 예수님의 적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고 덫을 놓은 적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든 한쪽에게는 적이 되는 상황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태 22.. 2022. 8. 3.
황보림 시인 / 꽃피는 레미콘 외 1편 황보림 시인 / 꽃피는 레미콘 출산이 임박해온 암소가 달동네 무더위 속을 오른다 만삭의 몸으로 보폭을 잃지 않던 엄마처럼 속도를 유지하며 달린다 얼마나 돌고 돌아야 저 언덕까지 피가 돌 수 있을까 늘 한 쪽 방향으로만 회전하는 너와 나와 그들이 섞이는 내장 속 곧 태어날 심장이 꿈틀 거린다 박동 약해질까 봐 몸 닳는 산모 자궁을 수축할 시간도 없이 질척하게 엉긴 살점들을 와르르 쏟아낸다 바닥을 차올라 기둥을 세우며 제 몸 굳히는 모래 사원이 어느 신전보다 뜨겁다 궁핍한 살림에도 식솔들 건사하며 나를 딛고 올라서라 지금도 굽은 등을 내미는 팔순의 엄마 엄마의 밑자리처럼 레미콘의 숨결이 굳어진 든든한 기반基盤 비탈길 오르내리는 엔진소리에 검은 잠에 빠져있던 빈터가 우뚝우뚝 꽃동네를 이룬다 황보림 시인 / 붉.. 2022. 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