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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213

김규성 시인 / 법성포 외 5편 김규성 시인 / 법성포 그때, 너나들이 가난에 세 들어 사는 고향은 칠산바다가 온통 술도가인 듯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술고래였다. 아버지는 그 중에서도 단연 왕 고래이셨다. 나는 아직도 속이 술술 풀려야 눈 질끈 감고 겨우 소주 반병쯤 마신다. 그래서 내 술은 음주가 아니라 약주라고들 놀린다 아버지는 그렇게 독약의 독은 당신이 죄 드시고 유산으로 내 속에 약만 슬쩍 담아 두셨다. 그 약을 딱 한번 치사량 직전의 독일 때까지만 마시고 싶다. 아버지가 그 속에 계실지 모른다. 김규성 시인 / 아름다운 시 게슈타포는 아우슈비츠에서 퇴근하자마자 제일 먼저 꽃병의 물을 갈고는 브람스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하이네의 연시를 읊었다 그리고 다음날 더 많은 목숨을 가스실로 보냈다 - 시간에는 나사가 있다. (달아실, .. 2022. 7. 2.
권기덕 시인 / 도마뱀 외 3편 권기덕 시인 / 도마뱀 도마뱀이 도마뱀 그림 속에 들어간다 도마뱀이 그림 속 도마뱀과 만나 살구를 혀로 핥는다 살구에서 봄 햇살이 흘러나온다 봄 햇살에서 맑은 물소리가 들린다 그림이 물에 젖는다 물에 젖은 그림에서 도마뱀이 허우적거린다 그림 속 도마뱀이 그림 밖으로 기어나온다 도마뱀은 수납장, 가죽 가방을 지나 잠든 그녀 꿈속으로 들어간다 곤충을 잡아먹는다 그녀의 불안이 깊어 간다 도마뱀은 늘 번식을 꿈꾼다 그녀의 안과 밖은 이미 그녀의 것이 아니다 도마뱀이 꿈속 구덩이에 빠졌다 기어오르기를 반목하는 동안 화분에는 꽃이 피거나 잎사귀가 부풀어 오른다. 세상에 없는 문장들이 꿈 밖에서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세 아이를 껴안고 죽은 어느 여인의 신문 기사 주변을 곤충들이 날아다닌다 그림자마다 도마뱀 꼬리를 가.. 2022. 7. 2.
고현혜 시인 / 검은 옷을 찾으며 외 1편 고현혜 시인 / 검은 옷을 찾으며 아버지 장례식에 가려고 검은 옷을 찾는다. 어렸을 적부터 언니와 내게 손수 옷을 사 입히셨던 아버지. 나, 열 몇 살 땐가. 어금니 아프다고 울면서 아버지 일하던 세탁소로 전화하자 딜리버리 도중 핫 핑크 미니스커트 사 오셔서 이젠 안 아프지 하시던 아버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그 핑크 미니를 입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장례식엔 꼭 가야 하나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아버지가 끝까지 살아 계실 것 같아. 어제 관 속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 꼭 주무시는 것 같았어. 고통 여기저기 퍼지던 암 덩어리만 죽고 아버지만 다시 사시면 안 될까. 절대 만지지 말라는 장의사 몰래 아버지 이마에 손을 얹어보니 차 얼음보다도 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기적을 부르짖.. 2022. 7. 2.
강서연 시인 / 벌레집에 세 들다 외 4편 강서연 시인 / 벌레집에 세 들다 백아산 골짜기 송이버섯 같은 집 한 채 갓 지붕 너머 낮달에서는 짙은 놋그릇 냄새 녹음이 벽지를 겹쳐 바른 이곳이 애초 벌레들의 집이었다니 그들은 날개가 있고 나는 없으니 그들에게 있는 것이 내게는 없었으니 무엇을 담보로 한 계절 묵어갈까 궁리하고 있는데 도랑물 수시로 쌀 씻어 안치는 소리에 문득 내가 당신을 이토록 사랑했었다니,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파온다 초저녁 비는 자귀꽃잎 사이사이를 적시고 벌레 먹은 배춧잎에 쌀밥 얹고 된장 한 숟갈 얹으면 그러니까 내가 사랑했던 당신을 데리고 붉은 지네 한 마리 기어 나온다 누가 이 늦은 밤에 싸릿대 질끈 묶어 마당을 쓰는가 잊어야산다 잊어야산다 뻐꾸기도 잠든 밤 주민세와 인터넷 사용료는 내가 낼 테니 전기세는 반딧불이와 정산하.. 2022. 7. 2.
박희연 시인(남) / 꽃길을 걷더이다 박희연 시인(남) / 꽃길을 걷더이다 올해는 봄꽃들이 유난히 곱고도 예쁘더이다. 비도 흡족하고, 햇살도 따사로워 봄꽃들이 서로 먼저 피려고 다투더이다. 하여 한꺼번에 꽃망울이 터지더이다. 코로나에 갇혀 사는 인간들을 위로하려는 착한 마음이더이다. 산이나 들의 꽃들이 화사하게 단장하고 저마다의 향기로, 저마다의 몸짓으로 제 자랑이 한창이더이다. 때마침 바람도 힘을 실어주니 꽃비가 내리더이다. 우리를 꽃길로만 걷게 하더이다. 박희연 시인 1934년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학 학사.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1962년에 등단. 고등학교 국어 교사. 시집 2012년 출간. 2022. 7. 2.
[신 김대건·최양업 전] (53) 백령도 입국 시도 [신 김대건·최양업 전] (53) 백령도 입국 시도 백령도 입국마저 실패하며 실의에 빠진 채 육로로 눈길 돌려 가톨릭평화신문 2022.06.26 발행 [1668호] ▲ 최양업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선을 타고 백령도에 도착해 조선인 신자들을 만나 본토로 입국하려 있으나 해도상의 오류로 백령도를 찾지 못해 실패하고 만다. 사진은 백령도에서 바라본 서해. ‘조선전도’ 없이 백령도로 항해 조선인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강남대목구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후 그해 5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백령도로 떠났다. 두 사제가 백령도로 향한 이유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의해서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보고에.. 2022. 7. 2.
강대선 시인 / 80년 0월 외 5편 강대선 시인 / 80년 0월 바람이 불어오면 노를 저어가자 바람의 노를 저어 서러운 혼들에게 바삐 가자 이름조차 없이 사라진 혼들이 또 얼마인가 바람에 혼을 싣고 망월동으로 넘어가자 죽음을 먹고 권력을 쥔 그날의 총성은 0월의 하늘을 흔들고 있건만 죽음은 죽음으로 흘러가고 이 땅에는 다시 오월의 꽃이 피어난다 기억은 흉터로 남아 어느덧 사십 년을 뒤로한다 책임자는 입을 다물고 남겨진 파편과 증언들만 가슴에 박혀 그날을 기억한다, 저 망월동 어느 깊은 곳에서 살아남은 우리를 부르고 있다 불의가 세상을 덮으면 또다시 깃발을 들고 나아가리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며 그날에 스러져간 죽음들을 떠올리리 망월동은 말한다 끝난 것은 없다 광주의 0월은 죽음을 자리에서 새로이 부활한다 이 땅의 주인이 누.. 2022. 7. 2.
황강록 시인 / 어둠 속의 댄서 외 1편 황강록 시인 / 어둠 속의 댄서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뭔가 우당탕 부딪치는 소리, 울음 소리, 소리 지르는 여자, 날카로문 뭔가 찢어지는 소리, 밖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빠르게 중얼거리는 소리, 급박하게 달려가는 발 소리, 누군가 절박하게 부르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보이지 않는 세상이 음악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질서와 규칙, 얼어붙어 가는 불, 음악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춤 출 수 있을 테니까... 밖에서 아니 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나는 소리를 더듬는다. 날카롭게 곤두선 숨 소리와 심장고동 소리가 섞여, 밖의 소리들과 섞여 음악이 된다. 음악이 되어야 한다. 밖은 어둡고 도망갈 곳이 없기에 황강록 시인 / 술 취한 .. 2022. 7. 2.
<디카시>최창균 시인 / 상생 최창균 시인 / 상생 식물아, 너에게 무릎 끓고 허리 구부렸더니 너는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어떤 망설임도 없이 자라는구나 최창균 시인 1960년 경기도 일산에서 출생. 198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창비, 2004)가 있음. 2022. 7. 2.
홍진기 시인 / 라일락 피어 외 1편 홍진기 시인 / 라일락 피어 라일락 꽃내음이 손을 들어 흔들어서 내 소녀 살내음이 문틈으로 배어 드네 성숙한 그 몸내음이 맑은 영혼의 향내음이 고독은 덧없는 푸념 시간을 태워내고 동살에 쫒기는 밤 갈래등에 불이 가고 살품을 돌아나가는 아침 열아홉쯤 꽃바람 배나무나 벚나무나 소쩍새 섧게 울어 살구꽃 그늘을 베고 돌아앉는 내 소녀 애채에 어린 새 앉아 피는 봄을 씹고 있네 2021. 32호 ​홍진기 시인 / 할머니의 석류나무 주인이 떠난 집을 석류나무 지키는 집 계절이 어느 사이 수십 번을 다녀간 집 석류꽃 철없이 붉어 휘어지는 죽지뼈 석류나무 그루잠*에 할머니 꿈을 꾸다 꿈에서 깨어나면 젖어있는 눈시울 긴 세월 어렵게 살며, 혼자 늙는 석류나무 * 그루잠: 두벌잠. 깨었다 다시 드는 잠 홍진기(洪鎭沂) 시.. 2022. 7. 2.
박희연 시인(여) / 날개 외 1편 박희연 시인(여) / 날개 몰락한 가문의 딸 같은 여왕개미를 잡아 유리병 속에 넣고 난 거대한 왕조를 꿈꿨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 똑, 똑, 비가 떨어지고 때론 밥솥도 의자도 나가떨어지는 가문 피리로 얻어맞은 허벅지가 부풀어 오른다. 오, 개미굴 같아라, 길을 내다오, 방을 내다오. 날개를 떼어내고 평생 알을 낳는 개미 날개옷을 잃은 선녀는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다. 우악스럽게 아이들을 다그치는 엄마들에게도 날개가 있었을까. 빗방울에 패인 흙이 유리병에 튄다. 무엇을 먹이로 줘야 할지 몰라 흙만 퍼 담고 숨겨놓은 개미 오늘 밤 꿈엔 낯선 남자를 끌어안는 대신 똑, 똑, 날개를 끊어내는 대신 네게 먹을 것을 줄 거야. 그러나 꿈은 토막 난 생선 같아서 곡 중간에 절단이 난다. (머리와 꼬리가 사라지고 배만.. 2022. 7. 2.
한연순 시인 / 분홍 눈사람 외 2편 한연순 시인 / 분홍 눈사람 오래된 잿빛 뼈마저 온 동네 꽃잎 내리는 날 나무와 나무 사이 전동 휠체어 한 대 멈춰 있다 흩날리는 꽃잎 음계를 밟고 따라갈 수 없는 마음인가 가슴을 문지르는 그리움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걸까 점심이 지나도록 나무와 나무 사이 한 사람이 그대로 앉아 있다 기억의 빈 문간에 꽂혀 있는 시간의 빛깔 ​ ​한연순 시인 / 공갈빵 백일몽이라도 잠적한 꿈은 늘 발효를 시도하지 누군가 텅 빈 내용을 먹고 있다 헛된 꿈이라도 잡고 싶은 날 봄볕에 모여든 사람들이 희망처럼 부풀어 오른 산산조각을 먹는다 단 꿀물 흐르는 허공의 메아리를 ​ ​한연순 시인 / 봄밤 덜컥 나의 심장에 시동이 걸릴 수만 있다면 골망이 찢기도록 너를 향해 중거리 슛을 날릴 수만 있다면 각자 축구경기를 보는 동안 놀란.. 2022.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