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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341

심지아 시인 / 정물화 도둑 외 1편 심지아 시인 / 정물화 도둑 봉제선은 말끔할 때조차 기괴하다.이브의 매끄러운 옆구리에서 사과가 쏟아진다. 떨어지는 순간, 사과는사과를 뱉어내는 사과처럼뱀이 된다. 뒤죽박죽이야 세계는.붓으로 뱀을 그리는 어린 세잔의 이목구비는 아직가지런하다. 캔버스 위에 붙였다 떼었다 한다.한 개 혹은 여러 개의 사과로 질문인 얼굴을 완성할 수 있어?사과 꼭지를 도려내는 칼끝처럼 날카로운 모서리들 나의 밤은 머리가 많은 뱀처럼 베개가 부족해.불행을 조제하는 테이블에서알약들의 테두리를 애무하며밤의 넓은 목구멍을 바라본다. 베어 문 사과처럼손등만이 남아 있는 시간 사과의 반쪽은 사과가 도달한 옆얼굴인가.부족한 손등은 시간의 완전한 테두리인가. 절반의 사과는 보다 짙은 냄새한 개는 부족하고 반쪽은 충분해.못된 쌍둥이처럼 이상하.. 2022. 9. 30.
성향숙 시인 / 꽃아, 문 열어라 외 1편 성향숙 시인 / 꽃아, 문 열어라 몇 개의 산맥을 넘고 넘어야흰 꽃이 피 빛이 되나은하수를 몇 번 건너야할머니 앉았다간 자리에 아기가 방긋 웃나얼마나 기다려야증조할머니의 흰 젖을 물고엄마가 마늘 씹는 웅녀 되나웅녀가 두 눈 반짝이는 곰이 되나얼마나 울어야 향기의 족적을 따라오래오래 골똘하다보면녹차나무에 붉은 동백꽃 핀다는데 작설차에 동백향 풍겼다 아기 동백 잎 이미 굳은 발바닥이다동백나무 숲에 밤이 오면찬별이 발바닥 밑에 쏟아지고늙은 엄마 등 구부려 별빛 쓸어 모은다나무 가지 사이 동박새 품고 있다 쪽진 머리 오래된 여자들의 발바닥가지 끝마다 피 빛 꽃 힘껏 밀어올린다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 시집, 에서 성향숙 시인 / 외면의 실루엣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돌리는 것은곁눈질로 나를 훔쳐보겠다는 것입은 일직.. 2022. 9. 30.
배홍배 시인 / 빗방울 전주곡 외 1편 배홍배 시인 / 빗방울 전주곡-쇼팽 프렐류드 커피잔 위로 쏟아지는 쌉쌀한 빗소리,소리를 향해 빗방울들 날아간다날아가는 품새로 되 던져지는오각형의 음의 덩어리, 보인다고요함과차가움과슬픔과외로음, 그리고 노스탤지어 보인다거꾸로 흐르는 오늘의 가장자리자정으로 가득 찬 시간한 번도 통화를 해본 적이 없어부패한 전화기가나의 귓속에 검은 상처를 냈을 것이다사람으로 넘쳐나는 몸뚱이 끝에서상처보다 깊게 자라는 고양이 정신과물물 교환된 나의 전생,그곳에다 버린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에서날카로운 빗방울은 뿌려진다, 다시 그리운 듯 - 음악 에세이 『classic 명곡 205.에서 배홍배 시인 / 모노 LP 음반 한 바퀴 돌면 핏줄 하나가 풀려나갔다칭칭 감긴 몸뚱이가 풀리기엔현기증이 더 필요했나튀는 바늘 끝에서 하늘.. 2022. 9. 30.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세상의 빛] 185. 복음과 사회교리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세상의 빛] 185. 복음과 사회교리 (「간추린 사회교리」 193항) 우리는 누군가의 책임과 희생 위에 살아간다 가톨릭신문 2022-09-25 [제3311호, 18면] 공동체 지탱하는 힘 ‘상호 희생’ 공동의 집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 기억해야 말레이시아 클랑강 쓰레기 더미에서 새들이 먹이를 찾고 있다. 베드로: 신부님, 저번에 과도한 육식, 남겨지고 버려지는 음식에 대해 많이 반성했습니다. 음식물을 함부로 버리고, 욕심에 따라 음식을 대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음을 알게 됐어요. 라파엘: 가축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사육되는 게 가슴 아팠어요. 미카엘: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관을 맺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에도 공감이 갔어요. 바오로: 제 소원만 이뤄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 2022. 9. 30.
백우선 시인 / 훈暈. 2 외 1편 백우선 시인 / 훈暈. 2 그의 화살로 내가몰래 쏘고 쏜 과녁인 나는고슴도치전신 심장의 화살투성이그 끝끝의 깃털로그의 하늘을빙빙 돌며 납니다 *훈暈 : 햇무리나 달무리와 같이 중심을 향하여 고리처럼 둘린 빛의 테. 백우선 시인 / 낙지 머리에 든 먹물은삶아도 쉽게 굳지 않는다붓 삼아 찍어 쓸손발가락이 토막토막 잘려입속으로 사라져도먹물은 붓을 기다린다일 초라도 더 버틴다먹이 아니라먹이가 되고 말더라도글이 되고 싶은 것은 이런매운 구석이 있다 백우선 시인 / 마부의 꽃 몽골 테를지에서 말을 탄 젊은 마부는갑자기 몸을 땅으로 깊이 굽혀노랑꽃을 꺾어 여인에게 웃으며 건넸다한 여인과 내가 탄 말 둘의 고삐를 잡고앞서 가다가였다.잠시 뒤에는 또 그렇게 하얀 꽃을 꺾어나한테도 주었다. 나는 그 꽃을나란히 가는 그 여.. 2022. 9. 30.
박병수 시인 / 사막을 건넌 나비 외 1편 박병수 시인 / 사막을 건넌 나비 돌아보니 안개 대신 모래를 흘리면서 바람이 바람의 방향으로 걸어간다 액막이 무녀가 다녀간 뒤 반세기 전의 내가 반세기 후의 무릎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었다 무너진 집터에는 흰개미가 갉아먹은 문설주와 서까래, 폐허에 머무르다 성체가 된 나비는 꽃이 판 구덩이로 돌아왔다 혼몽을 이마에 묶으면서 명부를 찾는 동안 여름에 진 꽃의 저주가 사막이 되지는 않았지만 바닥의 얼룩을 닦아내자 사막은 시작되었다 허물어진 벽뒤에서 어금니의 말이 모래를 남기고 사라진다 무덤 이전, 나비 이전의 나의 손이 낙타를 끌고 왔다 꿇은 자의 무릎은 목을 조여도 무릎이었다 안개가 부족해서 하늘의 소리를 듣는 새벽, 모래알 하나마다 천 개의 유령이 살고 있다 사막을 벗어나려 다시 사막을 걸어간다 모래를 .. 2022. 9. 30.
이혜미 시인 / 겨울 가지처럼 이혜미 시인 / 겨울 가지처럼 안으로 흘러들어기어이 고였다 온통 멍으로 출렁이던 몸두려움에 독주머니를 가득 부풀린괴이하고 작은 짐승 가지꽃이 많이 피면 가문다더니손가락으로 열매를 가리키면수치심에 겨워 낙과한다니 몸속에 위독한 가지들을 매달고주렁주렁 걷는 사람에게고결은 얼마나 큰 사치인가 ​숨기려해도 넘쳐 맺히는시퍼런 한때가 있어서 찢어진 가지마다 심장이 따라붙어우리는 모서리를 길들이기로 했다 한 바구니 두 바구니 수북이 따서 모은열매들의 참담을 생각하면부푸는 속내와 어두운 낯빛 사이에물혹 같은 곤란함이 도사리는데 ​겨울 가지는 삶아놓으면 더 푸르러지고푸르다는 건 내부에 멍이 깊은 병증이라피부 밑으로 서서히 들이치는 겨울가지의 색 월간 『​현대시』 2019년 8월호.발표 이혜미(李慧美) 시인1987년 경기.. 2022. 9. 30.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아는 만큼 보인다] 185. 은총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아는 만큼 보인다] 185. 은총 (「가톨릭교회 교리서」 1996~2005항) 생명의 은총인 성체성사는 ‘도움의 은총’이 필요하다 가톨릭신문 2022-09-25 [제3311호, 18면]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별의 인도 받은 동방박사처럼 생명의 은총 받기 위해서는 성사로 이끌어줄 은총 필요 마르칸토니오 프란체스키니의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의 마지막 영성체’. 프랑스 혁명 당시 어떤 어머니가 세 아들과 함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허기진 채 며칠 동안 산과 들판을 헤매던 그들은 덤불 속에서 혁명군들에게 발각됩니다. 상사가 그들을 본 순간 굶어 죽기 직전임을 알아차리고 측은한 나머지 빵 한 덩어리를 어머니에게 줍니다. 어머니는 굶주린 이리처럼 그 빵을 얼른 받아 세 조각으로 나누어.. 2022. 9. 30.
임희선 시인 / 이름 있는 사람들 외 1편 임희선 시인 / 이름 있는 사람들 새벽고양이 울음 지우는 청소차 경광등과간판 불빛 사이에서 태어난,빠르게 허물어질 그런 이름이 아니죠 여기, 새로운 학명을 부여받고묘표처럼 공손히 새겨진 사람들 얼굴에서 눈과 코와 귀를 지우고광대춤을 추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편한 세상', '숲속의 아침', '미소지움'식민의 군락에서 칸칸이 통에 담겨 라벨링된대단한 공명심이 불타오르네요 - 우리집 수조에 사는 고래요?- 기막히게 노래 잘 하죠- 라 벤더 꽃잎 몇 장 피우면 넘실넘실 향기를 부르죠- 서식하는 울음이라뇨?- 바람이 끌고 가는 구름처럼 게으른 삶이 얼마나 편한지요- 야채가 신선하게 부패하는 중입니다- 부패 과정을 냉장고는 싱싱하게 보관하죠- 응접실 바닥에 말라붙은 오렌지 주스처럼 끈끈하게!- 서로를 좀먹어 가는.. 2022. 9. 30.
송미선 시인 / 모텔 프린세스 외 2편 송미선 시인 / 모텔 프린세스 가까이 오면자동으로 문이 열립니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처럼네온사인도 켜지 않은 모텔 옆구리길고양이가숨어든다발끝에서 나뒹구는 페트병처럼투 툭, 주름치마가 헤프게 벌어진다 치마 속으로 숨어드는 길고양이 위태로워 보이는 등을 자동문이 급하게 껴안는다누구의 탓도 아니라며잠을 묶어두려고들고나는 사람들의 프로필을 가려준다 성가시게 따라붙는 길고양이를 따돌리며몇 가지 변명거리를 만든다얕은 수에 넘어간 쭈그러진 페트병꽈배기의 반란을 꿈꾼다 자동문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골목은 도깨비불이 번쩍인다주름 탓이라고 우기며 프린세스 출입카드를 꺼낸다 송미선 시인 / 달력 주는 여자 한 해를 통째로 건네준다이십년 넘게 거르지 않고 챙겨주는 탁상용 달력열세 번째 달에 그녀가 있다 다짐 비슷한 .. 2022. 9. 30.
문봉선 시인 / 안개숲 외 1편 문봉선 시인 / 안개숲 언제 숲은 다시 돌아올 것인가 갇힌 내 몸을 열고 싶다 늘 있다가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너에게 젖어들고 싶을 뿐이다 문봉선 시인 / 善善하다 고 빨간 석류 눈길 손짓 잦다예쁜 것은 맛있고맛있는 것은 善하다 착한 건 善 맛있고善 맛있는 건 예쁘다 고 예쁜 빨간 열매 보면입에 신침 고인다고 착한맛을 한 번 보면신눈물 고인다 예쁘고 착한 것은 하나다하늘아래 하나다참으로 고 빨갛고 예쁘고 착한 것은이 세상을 한 바퀴 돌려 이기는 힘이 된다 시집 2008 도서출판 天山 문봉선 시인1962년 대구광역시 출생. 동국대학교문화예술대학원 시창작 석사. 신인상. 시집 「독약을 먹고 살 수 있다면」「진심으로 진심을 노래하다」 「꽃핀다」황금알. 한국시인협회 신인상 수상. 과천율목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 2022. 9. 30.
김명철 시인 / 창백한 먼지 김명철 시인 / 창백한 먼지 보라색을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도라지 씨앗을 심어 꽃을 보려고 흙을 고른다. 한쪽이 깨져 모나고 흑빛으로 얼룩진 돌이 호미에 부딪친다. 보이저 1호가 보내온 암흑 속 지구 사진의 이름이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었다는 생각이 난다. ‘창백’과 ‘얼룩’ 사이에서 논란이 있었으나 문학적 표현에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나.내 이름으로는 얼룩이 어울릴 것 같다. 神쪽에든 우주 쪽에든 나는 인간적이거나 혹은 물질적으로도 어떤 구원이나 역할을 요청할 의향이 없으므로. 저 멀리 아랫마을 분홍 기와집 앞에 우편배달 오토바이가 멈추어 선다. 무엇을 심으려는 것일까. 떠난 사람을? 떠날 神을?오토바이 옆으로 덤프트럭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솟아오른 흙먼지가 배달부를 뽀얗게 뒤.. 2022.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