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09341

김다연 시인(천안) / 버찌가 익을 무렵 외 1편 김다연 시인(천안) / 버찌가 익을 무렵 고요할수록 깊어지는 것이 있다 오월의 햇살 아래 깊어짐으로 오히려 아련한 기억을 불러내는 것들 잊혀졌다고 여긴 것은 잠시다 햇살 촘촘히 새긴 잎 사이로 가장 낮고 무거운 빛을 쏟아내는 것들 해묵은 침묵을 견디지 못해 맨발 훌훌 털고 아낙의 눈 속을 파고든다 봄빛은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 않는다 김다연 시인(천안) / 저 혼자 머무는 풍경 역은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오고가는 이들의 발길 뜸해졌거나 머물던 사람들 떠나갔어도 햇빛 맑으면 맑은 대로 비바람 몰아치면 몰아치는 대로 산으로 강으로 꽃으로 나무로 허물어지는 지붕의 그림자를 지우며 혈육 같은 개망초꽃들 피우고 또 피웠다 간혹 길을 잃은 노루나 고양이가 찾아와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을 풀어놓기도 했지만 순간의 머무.. 2022. 9. 24.
조성순 시인 / 내성천 외 1편 조성순 시인 / 내성천 여름에도 눈이 내렸다. 그믐이면 은핫물이 기울어 그런 밤이면 사람들은 무명 홑이불을 들고 모래 갱변으로 나가서 물을 맞았다. 아무개 집 딸 혼사가 다가오는데 누구는 감주를 빚고, 누구는 배추전을 부치고 물 건너 뉘 집 아들 코로나 백신을 개발하여 온 세상이 마스크 감옥 벗어나게 되었다고 개성공단이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며 금강산 만물상을 다녀온 텃골 김 씨는 이젠 죽어도 원이 없다고 홑이불엔 은핫물이 넘실거리고 모래사장엔 사람살이 이야기가 달맞이꽃으로 피었다. 물길 막은 영주댐 허물고 길을 여니 자갈로 굳었던 땅에 검푸른 수초들 사라지고 모래가 다시 흘러 왕버들 늘비한 물 섶에는 버들치 모래무지 은어 떼 소곤거리고 장어가 먼바다 이야기를 데리고 오셨다. 뚝방 위 금줄 두른 둥구나무 .. 2022. 9. 24.
장이엽 시인 / 수국은 헛꽃을 피웠네 외 1편 장이엽 시인 / 수국은 헛꽃을 피웠네 수국이 헛꽃을 피운 것은 참꽃 때문이었네 암술 수술 총총 박힌 꽃무리가 너무도 작아 벌 나비가 찾지 못할까 봐 보이지 않을까 봐 언덕배기 바람 많은 그곳에 서서 꽃잎 하나하나 다정하게 보듬어 안고 바다를 보면 파란 물을 들이고 노을을 보면 빨강 물을 들이고 탐스러운 헛꽃 송이들 하늘 아래 활짝 펼쳐 놓은 채 오가는 이 눈 코 입 멈춰 세우며 참꽃 열매 뭇별처럼 알알이 영글어가도록 기다려 주었네 흰 등줄기 야위어 삭아질 때까지 지키고 있었네 제자리에 서 있으려는 몸부림이 그저 삶이었네 비워내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실천이었네 장이엽 시인 / 어떤 후유증에 대한 기대 시인들의 모임을 다녀온 다음에는 아프다 시를 잘 쓰는 사람도 보고 시를 못 쓰는 사람도 보고 시를 읽는 .. 2022. 9. 24.
전정아 시인 / 오렌지나무를 오르다 외 1편 전정아 시인 / 오렌지나무를 오르다 뿌리 앞에 서면 들린다 물관 깊이 물 흐르는 소리, 나무 위를 오르는 치어 떼들이 아가미 여닫는 소리, 설익은 비린내가 가지 끝에서 대롱인다 나는 잠속에 빠져 있는 등본을 깨워 주소를 받아낸다 산 1리 2번지여 안녕? 대추나무 가지가 담벼락에 팔을 뻗고, 마당에선 백일홍이 쿨렁인다 옷자락 비비는 소리가 문지방을 넘어, 더럭 신발을 들춘다 한 무더기의 별들이 진분홍 빛 잇몸을 드러낸다 창을 열어 젖멍울을 익히던 소녀, 거취 불명 같은 사춘기의 문을 빠져 나와 창을 두드리면 카나리아가 노래를 흘리고, 바게트 빵 굽는 냄새가 난다 변성의 소리를 가진 짝사랑의 남자와 동거하던 일기장, 주홍빛 알전구가 속살을 붉힌다 치어 떼를 품은 껍질을 단단하다 입 안 가득 넣으면 톡톡 단물.. 2022. 9. 24.
김다연 시인(익산) / 단풍 외 1편 김다연 시인(익산) / 단풍 저물게 물들던 떡갈나무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새떼들도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매미들도 단풍잎 몇 장으로 자물쇠를 채워 놓고 홑장삼을 벗어 놓았다. -시집 『바늘 귀를 통과한 여자」 김다연 시인(익산) / 레이메이드 인생 ; 치매 애초 아버진 불알 두 쪽이 밑천이었지요 체면과 똥고집에 기울어버린 가세 지키느라, 그마저 늘어지고 쪼글쪼글해졌지요 이밥처럼 장독에 쌓인 눈 멍하니 바라보다 얘야 밥 먹자 가부좌를 트는 늙은 홀애비의 핫바지 새로 얼핏, 시렁에 얽힌 곶감 같은 저 속에 떨떠름한 열 개의 씨가 박혀 있었다니! 한쪽은 맨정신 또 한쪽은 망상 아버진 애초 느자구 없는 짝불알이었지요 시집 『우연히 잡힌 주파수처럼, 필라멘트처럼』 김다연 시인(익산) 1961년 전북 익산 출생... 2022. 9. 24.
이현지 시인 / 꽃잎은 바람을 물고 이현지 시인 / 꽃잎은 바람을 물고 새벽 무렵 달팽이관 속 까만 돌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맨질맨질한 그 작은 돌이 귓속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산호수잎이 검게 변하고 사방 모서리마다 뾰족한 뿔이 나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따라 돌다가 백화산 입구 자목련나무 위로 나를 훌쩍 올려놓았다 철보다 앞서 핀 명자꽃잎이 우루루 몰려 와 물개 박수를 치고 있다 슬그머니 등 뒤를 지나던 어둠을 한 웅큼 잘라 속주머니 깊숙히 찔러 넣는다 위급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제 소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고 있다 링거병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이현지 시인 강원도 영월 출생. (본명: 이순옥) 주성대 문창과 졸업. 201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예술아카데미 및 딩아돌 문학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충북재능시낭송협회 회원. 2022. 9. 24.
[신 김대건·최양업 전] (63)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중) [신 김대건·최양업 전] (63)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중) 박해 피해 동굴서 교우들과 생쌀 먹으며 숨어 지내기도 가톨릭평화신문 2022.09.25 발행 [1679호] ▲ 죽림은 최양업 신부가 경신박해를 피해 3개월간 숨어지내며 마지막 편지를 쓴 교우촌이다. 사진은 CPBC가 제작한 드라마 ‘탁덕 최양업’의 죽림굴 장면. 불무골 불무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가 1857년 9월 2통의 편지를 쓴 곳이다. 최 신부는 이곳에서 14일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15일 홍콩 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최 신부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자신이 그동안 수집한 순교자들의 자료들을 그해 3월 25일 조선대목구 부주교로 임명돼 주교품을 받은 다블뤼 주교에게 모두 드렸다고 했다. 다블뤼 주교는 내포에서 조선 교회 .. 2022. 9. 24.
신경림 시인 / 별 외 1편 신경림 시인 / 별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신경림 시인 / 눈이 온다​ 그리운 것이 내리는 눈 속에 있다. 백양나무 숲이 있고 긴 오솔길이 있다. 활활 타는 장작 난로가 있고 젖은 네 장갑이 있다. 아름다운 것이 다 쌓이는 눈 속에 있다. 창이 넓은 카페가 있고 네 목소리가 있다. 기적 소리가 있고 바람 소리가 있다. 지상의 모든 상처가 쌓이는 눈 속에 있다. 풀과 나무가, 새와 짐승이 살아가며 만드는 아픈 상처가 눈 속에 있다. 우리가 주고받은 맹서와 다짐이 눈 속에 있다. 한숨과 눈.. 2022. 9. 24.
홍사성 시인 / 신춘법어(新春法語) 외 4편 홍사성 시인 / 신춘법어(新春法語) 참새 두 마리 머리 맞대고 포륵포륵 봄볕 밝은 마당 짝 찾기 놀이 즐겁다 검은 흙 들추고 얼굴 내민 씀바귀 지난겨울 추위 따위 돌아보지 않는다 홍사성 시인 / 수처작주(隨處作主) 월요일 밤마다 보는 가요무대 몇 십 년째 진행하는 사회자 호명하면 나와서 노래하는 가수 뒤에서 춤추는 백댄서 옆에서 코러스 넣는 합창단 박자 맞춰주는 오케스트라 흥겨운 연주에 박수치는 방청객 즐겁게 해주려고 머리 싸맨 연출자 의도대로 편안하게 시청하는 사람들 다 잘났다 홍사성 시인 / 만법귀일(萬法歸一) 오늘도 해질 때까지 당신만 참구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꽃은 당신의 얼굴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당신의 노래 코에 스치는 모든 냄새는 당신의 향기 혀끝에 맴도는 모든 미각은 .. 2022. 9. 24.
문신 시인 / 독작 獨酌 외 1편 문신 시인 / 독작 獨酌 두 홉짜리 소주병을 땄다 병과 잔 사이는 한 치가 못 되었다 그 사이에 삼라만상의 근심이 깊었다 주섬거리지 않고 탁, 털어 넣었다 안주는 오래 물색하였다 달이 떴고 밤새 소리도 펼쳐 있었다 강물의 물비늘 두어 장을 쭉 찢었다 질겅거렸다 두 홉짜리 소주병이 비었다 강물의 수위가 한 치쯤 낮아져 있었다 노을에서 시작하였으나 어느덧 여명이었다 내내 독작이었다 문신 시인 / 불꽃인데 몸에 호랑이 문신을 한 형에게 돈을 빼앗겼다 그날 밤 나는 팔뚝에 용을 그렸다 빨간 볼펜으로 용의 입에 불꽃도 그렸다 갑자기 팔이 튼튼해져서 호랑이쯤이야 가뜬히 때려잡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침에 세수를 하다가 양치하러 들어온 엄마에게 문신을 들키고 말았다 -아유 깜작이야, 팔뚝에 뱀을 왜 그려? 엄마가 때수.. 2022. 9. 24.
강기원 시인 / 현관 외 1편 강기원 시인 / 현관 나는 밤의 현관에 서 있는 사람 현관에 고인 찬바람 속의 사람 한 발은 안에 한 발은 밖에 가물가물 걸치고 가만히 서서 발에 물집이 잡히는 사람 고개 든 채 잠든 오령의 멧누에 꿈속처럼 무릎 없이 변모를 기다리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시집 『다만 보라를 듣다』(민음사, 2021) 중에서 강기원 시인 / 나비잠자리 다리 누가 이렇게 예쁜 이름을 지어 줬을까? 나비잠자리 다리 아래를 지나며 우리가 될 수 없던 우리는 서로에게 물어보았지 나비도 잠자리도 올 리 없는 겨울에 나비잠자리 가느다란 다리처럼 위태로운 날들을 건넜지 부서지기 쉬운 담청색 날개 눈부시게 산란하는 검고 푸른빛 원인을 알 수 없는 편두통이 계속되었어 나비 닮은 잠자리 나비잠자리 잠자리 닮은 나비 잠자리나비 투명잠자.. 2022. 9. 23.
김명국 시인 / 있으나 마나 한 담 외 1편 김명국 시인 / 있으나 마나 한 담 볼 테면 언제든지 한번 보슈, 하고 세워놓은 것 같은, 그런데 그 담 너머로 고개 쳐들고 들여다볼 이는 한 사람도 없을 듯 아무리 생각해봐도 있으나 마나 한 담이다 없다면 한집인 줄 알까 봐서 그렇게 되면 곤란할 것 같아 세울까 말까 망설이다 금이나 그어놓고 살자 해서 세운 담 잠깐 필요해서 빌린 연장인데 그 연장 주인이 다시 찾으러 올 때까지 안 갖다 주고 있다가 능청맞게 내주면서 깜박했다고 씩, 한번 웃어만 줘도 용서가 되는 담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토라져 싸움도 하고 말도 안 하고 지냈던 무지 불편했던 담 그 집 개도 꽃 보기 싫던 담 하지만 곧 이바지 떡 한 접시로 화해하고 사는 담 담 넘어온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감은 가을이면 따먹어도 되는 있으나 .. 2022.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