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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남 시인 / 그늘의 우화 강재남 시인 / 그늘의 우화 그러므로 그늘에 감염된 당신은 춥고 어두운 곳에서 만난 오늘의 설정입니다 그늘은 그늘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제 몸을 늘일 때 그 속에 숨은 그림자는 숨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에게서 빛을 다 내보낼 때 비로소 그늘은 제가 딛고 선 땅의 깊이를 알아챌 것입니다 그리하여도 이 빛나는 풍경에서 그늘은 제 속 어디에 그림자가 터질지 무심할 것입니다 하지만 잎이 무성한 길목이나 깊은 여름으로 가는 끝에서 당신은 잠시 다른 오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오늘에서는 양떼와 목동이 지나고 광대와 소년이 지날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공손하고 당신에게 불평할 것입니다 양떼를 몰고 서쪽으로 가는 목동은 소년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북쪽을 향해 동그랗게 이마를 가리면 양떼를 버릴 수.. 2022. 9. 25.
최명란 시인 / 달콤한 소유 외 1편 최명란 시인 / 달콤한 소유 찢어진 내 청바지에 꽃이 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게도 꽃들이 활짝 피어날 것이다 활짝 핀 꽃대 위에 달콤한 비가 내릴 것이다 개구리는 지천에서 베이스 톤으로 울고 장대비는 꽃들을 흠뻑 적시고 짱짱히 일어설 것이다 돌담을 붙잡고 일어서는 담쟁이처럼 나도 장대비를 붙들고 비를 따라 일어설 것이다 건조한 목구멍을 비에 촉촉 적시며 아직 눈뜨지 못한 새끼들을 오글오글 키울 것이다 걸음 서툰 노인이 눈앞으로 지나가도 늙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희미해져가는 햇빛에 희망을 걸 것이다 사랑하는 우리 흐르는 강물을 함께 바라볼 것이다 결혼식 날 소란 속에 열렬한 노래를 부를 것이다 최명란 시인 / 지퍼에게 내 몸은 언제나 당신의 정반대 방향에서 뜨겁고 잠이 깨면 당신과 나는 등과 등.. 2022. 9. 25.
[정규한 신부와 함께하는 기도 따라하기] (1) 연재를 시작하며 [정규한 신부와 함께하는 기도 따라하기] (1) 연재를 시작하며 따라하며 배우는 기도 가톨릭신문 2022-09-11 [제3310호, 15면] 이냐시오 영신수련 바탕으로 묵상과 관상 통한 기도 훈련 매주 성경구절 정독 후 기도 ‘숙고하기’ 위한 자료 제공해 관상기도에 이르도록 도와 예수회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바탕으로 성경 묵상과 관상을 통해 기도를 훈련하는 ‘정규한 신부와 함께하는 기따기(기도 따라 하기)’를 시작합니다. 정규한 신부의 안내에 따라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요점을 숙고하다보면 하느님과 함께하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영신수련에서 묵상기도란 기도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하여 “기억력, 이해력(지성)과 의지를 활용(적용)하여 숙고하는 것”(영신수련 50번)을 말합니다. 관상기도는 “인물들을 살펴보.. 2022. 9. 25.
[말씀묵상] 연중 제26주일·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말씀묵상] 연중 제26주일·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제1독서 아모 6,1ㄱㄴ.4-7 / 제2독서 1티모 6,11ㄱㄷ-16 복음 루카 16,19-31 가톨릭신문 2022-09-25 [제3311호, 19면] 약자의 고통에 무관심한 세태 관심 갖고 도움의 손길 내밀며 주님의 뜻대로 그들의 편에 서길 레안드로 바사노 ‘부자와 라자로’. (1595년) 시골 본당에 있을 때 공소를 지어야 했습니다. 공소 신자들의 힘만으로는 건축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모금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혼자 모금을 나간 것은 아니고, 신자들과 함께 다녔습니다. 신자들은 본인들이 준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팔 것들을 마련하셨습니다. 섬에서 나오는 바지락이나 굴이나 김이나 물고기 말린 것들, .. 2022. 9. 25.
조태일 시인 / 어머니 곁에서 외 2편 조태일 시인 / 어머니 곁에서 온갖 것이 남편을 닮은 둘쨋놈이 보고파서 호남선 삼등 열차로 육십 고개 오르듯 숨가쁘게 오셨다. 아들놈의 출판 기념회 때는 푸짐한 며느리와 나란히 앉아 아직 안 가라앉은 숨소리 끝에다가 방울방울 맺히는 눈물을 내게만 사알짝 사알짝 보이시더니 타고난 시골 솜씨 한철 만나셨나 산 1번지에 오셔서 이불 빨고 양말 빨고 콧수건 빨고 김치, 동치미, 고추장, 청국장 담그신다. 양념보다 맛있는 사투리로 담그신다. - 엄니, 엄니, 내려가실 때는요 비행기 태워 드릴게. - 안 탈란다, 안 탈란다, 값도 비싸고 이북으로 끌고 가면 어쩔게야? 옆에서 며느리는 웃어쌓지만 나는 허전하여 눈물만 나오네. -(1971) 조태일 시인 / 겨울꽃 겨울 벌판 어느 후미진 곳에 마를 대로 마른 꽃들이 더.. 2022. 9. 25.
이창수 시인 / 차 한 잔 외 1편 이창수 시인 / 차 한 잔 눈에는 연둣빛 풀밭 코에는 은은한 향기 귀에는 쪼로롱 물의 노래 손에는 정다운 찻잔 입에는 새봄 맛 담뿍 마음은 마음은 비 갠 하늘 무지개 이창수 시인 / 요세미티 머나먼 옛날 하늘 문이 열리고 비바람 천둥 번개 몰아 칠 때 천지 개벽하는 창조주의 크신 음성에 거대한 땅덩어리는 놀라 요동치며 깨어지고 갈라져 여기 저기 높은 산, 험준한 계곡, 굽이치는 산세가 되었더라 구름에 닿은 깎아지른 돌산들에서는 여기 저기 폭포수 뿌려지고 깊은 계곡 하늘에서 흐르는 물들은 굽이굽이 강줄기 이루어 겨울엔 온 천지 하얀 눈꽃 속에 주렁주렁 긴 고드름 자랑하고 여름엔 깊은 계곡 짙푸른 숲속에서 시원한 물바람 소리 들렸는데 이름하여 요세미티 머세드 강이라 하였더라 아아 거대한 대자연의 웅장함이여 .. 2022. 9. 25.
이강하 시인 / 붉은 화첩 외 1편 이강하 시인 / 붉은 화첩 해 지는 저녁이 가면을 쓰고 꿈틀거린다 어둠 속 가면이 백기를 든 골목으로 사라지면 진실을 고백할 때다 해넘이 찰나가 해돋이 찰나를 이해하듯 바오바브나무는 성장기를 펼치며 혹한 시절의 나이를 꺼내서 매만진다 저녁이면 어떻고 새벽이면 어떤가 수백 년 뒤 미국이면 어떻고 수백 년 뒤 프랑스면 어떤가 가슴이 텅 빈 여기 깊숙한 숲에서 못생기고 뚱뚱한 동화를 쓰면 또 어떤가 서로가 통했다면 해지는 저녁이지 해 없는 동안만은 농한 기도로 고통을 덜어낼 것 해가 떠 있는 동안만은 일터에서 착한 공기로 서로의 거리를 배우며 사랑하기 해 지는 광경은 고통이면서 기쁨이다 시공을 초월한 불사의 사다리가 길어지는 강가 바오바브나무 표정이 축축하다 바오바브나무야, 더는 자책하지 마 너는 너일 뿐, .. 2022. 9. 25.
유승영 시인 / 형광펜은 언제나 외 1편 유승영 시인 / 형광펜은 언제나 하루 세 알의 알약을 먹어요 한 알은 먹자마자 토하고 또 한 알은 정신을 말짱하게 해주니 하루가 잘 굴러가요 나머지 한 알은 눈을 감고 삼켜야 해요 눈알이 뻑뻑해지면 곤란하거든요 노란 아이는 세 알 먹기로 하루를 시작해요 세 알의 알약은 땅따먹기에요 네모와 세모의 땅을 한 발로 저 윗 칸까지 가야 해요 어떻게든 금을 밟지 않고 하늘까지 알약을 향하여 던져놓은 망을 향하여. 까치발로 비틀비틀 금을 밟지 않고, 쏟아지는 알약 쏟아지는 졸음 쏟아지는 별빛 오늘 간식은 복숭아였니 우유였니 복숭아도 우유도 아니었어요 할머니와 아이는 노랗게 입을 오물거려요 할머니보다 빠르게 현관으로 달려가 노란 버튼을 눌러요 노란 할머니와 노란 아이는 날마다 함께 등원을 해요 심장 박동기를 달고 나.. 2022. 9. 25.
안수환 시인 / 아내의 바다 외 1편 안수환 시인 / 아내의 바다 내 아내는 나뭇잎에 물든 물방울을 보면 바다라고 부른다 햇빛이 반짝이는 날, 나뭇잎을 쓸고가는 바람을 보면 바다라고 부른다 바다는 저쪽에 있는 것 바다는, 호수보다도 크고 노을보다도 먼 곳에 있는 줄 잘 알면서도 나뭇잎을 물들이는 물방울을 보고 바다라고 부른다 안수환 시인 / 먼 산 나는 오늘 인천가족공원 묘지에 갔다 죽어서 되살아난 여흥 민씨, 해주 오씨, 함양 박씨....... 존재의 빛은 학설이 아니라 붉은 장미, 푸른 잔디, 자작나무, 금계국이었구나 먼 산 위에 올라앉은 흰 구름 몇 조각까지 안수환 시인 1942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한 후 고려대 대학원을 거쳐 명지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1975년 《시문학》과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 저서로.. 2022. 9. 25.
조연향 시인 / 내 마음의 구치소 외 1편 조연향 시인 / 내 마음의 구치소 나는 구치소 푸르른 담벽을 끼고 산다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지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을 뿐 어떤 법조항으로도 얽어맬 수 없었을 뿐 저 날아다니는 새들은 알고 있을 거야 허공에 뜬 흰 감시탑을 지나노라면 내 안에도 가시철조망 높이 솟아 있어 움찔 놀라 멈춰 선다 내가그토록 오래된 미결수였다니! 저기 혹 내게 면회 온 사람? 철거덕 길고 긴 복도를 지나 쇠창살을 열고 나가면 소스라치게 그리웠던 햇빛 맨드라미 채송화 푸르른 담벽 아래 바람 한 페이지 받쳐들고 있다 조연향 시인 / 초원의 빛 별들이 기둥과 벽을 세워 천막을 치고 난롯불 피워놓았네 장작은 장미꽃처럼 불타오르다 쉬이 사그라지고 말아 게 눈 감추듯 피 냄새를 감추며 짐승의 살점을 뜯을 때,.. 2022. 9. 25.
김경민 시인 / 흔적 김경민 시인 / 흔적 연기가 피어 오른다 집 허무는 사람들이 연기를 쏘이며 빈병과 플라스틱을 골라내고 집터에서 나온 쓰레기를 모은다 휑댕그레 남은 학교 운동장 옆으로 넘어진 세종대왕과 텅빈 교정 아이들의 목소리가 불어가고 풍금소리와 노래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빈 골대와 수돗가에 조금씩 물이 차올라 적요에 잠긴 빈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 들려온다 붉은 가위표시의 집들 주위로 어지럽게 날리는 신문지 잡풀 위를 덮고 무언가 남은 이야기처럼 떠나지 않는 기척이 조금씩 시간에 잠겨간다 김경민 시인 1954년 서울 출생. 부산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0년 한국문학에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 시집 1993년 1998년. 한국시문화회관 대표 2022. 9. 25.
김혜천 시인 / 묵화墨畵 외 3편 김혜천 시인 / 묵화墨畵 적막한 하늘은 지구의 서사를 끌어안고 침묵 중이다 침묵은 더 이상 침묵 할 수 없을 때 노골적으로 몸통을 드러낸다 지구의 구석구석을 살피던 태양이 산 허리를 돌며 깔아 놓은 데크 위에 기형의 명암을 풀어내는 정오 지구는 쓰레기 산에서 고름이 줄줄 흐르고, 바이러스가 얼굴을 바꿔가며 활개를 치고 있구나, 지구인들은 삶과 죽은의 경게가 맞닿아 불안에 떨고 있구나, 숲을 이루어야할 나무의 뼈들이 병들어 비틀리고 말라가며 재앙의 날이 오기도 전 고열로 몸살을 알고 있구나 쪽빛과 초록은 사라지고 검고 숭숭 구멍난 목덜미만 앙상한 나무의 초상 뒤틀리고 벌레먹은 그늘의 의미를 받아 적을 수 있다면 데칼코마니로 저 눈물을 찍어낼 수 있다면 내 안에 흐르는 몇 광년의 청정한 거리로 걸어갈 수 있.. 2022.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