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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기 시인 / 향유 고래 외 1편 임덕기 시인 / 향유 고래 알래스카 근처 베링해에는덩치 큰 시인들이 모여 산다 알레그로 속도로 부는 바람 따라 자맥질하며향기로운 내음을 가슴에 품고물의 중심에서 떠돌며 이리저리 헤맨다 마음이 허기지면 멀리 떨어진 동료에게낮은 소리로 말을 건네고이따금 숨비소리로주위에 제 존재를 알린다 선조들이 뭍의 야수를 피해 찾아 들었던 바다 물의 가시가 가슴을 찌르는 날에는해변에 올라와 물을 거부하며떠나온 육지를 그리워한다 눈앞에 아슴아슴 떠오르는 푸른 풀밭그 위를 천천히 걸어가는 꿈을 꾼다 임덕기 시인 / 봄, 무대에 서다 봄 무대 커튼을 활짝 열어 제친다산수유, 매화가 까치발로 들어온다 개나리 우중충한 무대 배경에강렬한 노랑을 덧칠한다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목련깜짝 초대장을 여기저기 뿌리며 하얗게 웃는다 자지.. 2022. 9. 26.
홍수희 시인 / 2월에 쓴 시 외 1편 홍수희 시인 / 2월에 쓴 시ㅡ 부산역에서 지금쯤 어딘가엔 눈이 내리고지금쯤 어딘가엔 동백꽃 피고지금쯤 어딘가엔 매화가 피어지금쯤 어딘가에 슬픈 사람은햇살이 적당히 데워질 때를 기다려눈물 한 점 외로운 벤치 위에 남겨두고서다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겠다다시 어디론가 길을 뜨고 있겠다 홍수희 시인 / 그렇게 2월은 간다 외로움을 아는 사람은2월을 안다 떨쳐버려야 할 그리움을 끝내 붙잡고미적미적 서성대던 사람은2월을 안다 어느 날 정작 돌아다보니자리 없이 떠돌던기억의 응어리들,시절을 놓친 미련이었네 필요한 것은 추억의 가지치기,떠날 것은 스스로 떠나게 하고오는 것은 조용한 기쁨으로 맞이하여라 계절은가고 또 오는 것사랑은 구속이 아니었네 2월은흐르는 물살 위에 가로 놓여진조촐한 징검다리였을 뿐다만 소리없이 떨.. 2022. 9. 26.
[신원섭의 나무와 숲 이야기] (18) 숲에서 면역력 키우기 [신원섭의 나무와 숲 이야기] (18) 숲에서 면역력 키우기 면역력 강화, 숲에서 찾자 가톨릭평화신문 2022.09.25 발행 [1679호] 면역력이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지켜주는 수비대이다. 외부로부터 침입한 바이러스나 병균을 잡아주어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해주고 또 병에 걸리더라도 잘 극복해 치유되게 해준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는 면역력의 중요성을 더 실감하게 되었다. 같은 공간에서 코로나바이러스에 노출되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코로나에 감염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멀쩡한 경우를 본다. 면역력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면역은 우리 건강에 기초적인 바탕이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현대 의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히포크라테스’도 이 면역에 대해 ‘우리 몸이 가.. 2022. 9. 26.
고은산 시인 / 빛의 탄생 외 3편 고은산 시인 / 빛의 탄생 수척한 빛을 털어내기 위해, 틈 없는 밤의 격자 공간 속을 멍하니 바라본다. 머리를 움켜쥐고 공간을 바라보니 실금이 가기 시작 한다. 실금 사이로 청어빛 언어가 들락거린다. 언어의 들머리는 빛이 없었으나, 틈을 통과하는 순간 바뀌는 놀라운 변화. 지나가는 출출한 시간이 이마를 맞대고 변화의 손을 부드럽게 잡는다. 마른 손이 반들반들해지고 온통 청어빛으로 물든다. 손은 바다이 다. 사이가 더 벌어지는 순간, 시의 미끌미글한 뼈의 마디마디를 갈고 닦는 바다에 푸른빛이 넘실거린다. 파도 안에 수많은 빛이 출렁인다. 고은산 시인 / 독백 얼멍얼멍, 욕망의 나무숲, 촘촘히, 우뚝우뚝 솟아 있었네. 마음의 등뼈를 세웠네. 휘적휘적 등뼈가 흔들거렸네. 흔들흔들 바람 따라갔네. 바람은 푸르름.. 2022. 9. 26.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길의 성모 재속 수도회(상)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길의 성모 재속 수도회(상) 각자의 전문성에 맞춘 사도직 수행 가톨릭신문 2022-09-18 [제3311호, 4면] 길의 성모 재속 수도회는 각자의 전문적 능력에 따라 개별 사도직을 수행한다. 길의 성모 재속 수도회는 교황청에 소속된 재속 수도회로서 세상 안에서, 매일의 일상 삶 안에서 봉헌의 삶을 살아가며 세상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믿음과 사랑과 구원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길의 성모 재속 수도회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36년 2월 26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부터다. 예수회원인 칼 딩카우저(Carl Dinkhauser) 신부에 의해 ‘길의 성모 수도회’라는 이름으로 창립, 1938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교황청 인준을 받았다. 공동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은 마.. 2022. 9. 26.
심인숙 시인 / 봄의 코뿔소 외 1편 심인숙 시인 / 봄의 코뿔소 움직임이 포착된다, 철로변의 이곳과 그곳퍼붓는 볕과 자갈밭 사이 외따로헝클어진 지평선 너머 뿌연 침목 위로솟아나는 뿔, 바람은 어쩌자고 햇빛분자를 일으키며 이곳까지신(神)을 불러오는 걸까 눈빛은 더욱 내밀해져딛는 발자국도 뿜어내는 콧김도 없이고요 속 제 몸을 분분히 풀어놓고 있다 너도 집이 그리웠던 거야그날의 연둣빛, 칸칸의 계절 속으로 돌아오다니조금 더 머뭇거리며 한사코 흰 뿔을 펄럭이며어여쁜 몸짓으로 다가오렴 한 마리 코뿔소는 도무지 탄생을 모른다 심인숙 시인 / 한낮과 큰곰자리별나라 봄볕이 꺼내든 열쇠 하나가 어느 국경을 통과한다 녹슨 열쇠의 홈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큰곰자리별나라를 쫓아 아지랑이의 연대기 속을 휘돌아간다 모래와 풀빛이 출렁인다 은하의 도림천으로 올라서면 .. 2022. 9. 26.
최영랑 시인 / 네트의 뉘앙스 외 1편 최영랑 시인 / 네트의 뉘앙스 불편해, 그래서 너와 함께 복식을 구성할 수 없어 패배와 승리의 기분 또한 내 것이 아니잖아 셔틀콕을 쫓아가는 본능 때문에 그저 우리가 되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내 옆을 서성이는 것 말고 스텝 바이 스텝, 나에게 멀어질 방법을 궁리해봐 손의 감각으로 아슬아슬한 높이를 사랑하는 건 위험해 내가 움츠리는 건 반칙이니까 후회는 선을 넘지 못한 아주 미미한 수치로 판가름 날 거야 날렵함에 집중하며 점프를 끌어 올려봐 내 키는 늘 고만고만하니까 오래 다진 순발력은 오늘에 대한 진지한 태도겠지 바닥에 널브러진 발자국들의 환영을, 훅 치고 들어오는 스매싱 같은 타인의 시선을 열심히 연기할 필요는 없어 우리의 태도는 딱 거기까지야 관계 말고 관심 말고 관성만을 떠올려 너는 처음부터 저쪽에 .. 2022. 9. 26.
최향란 시인 / 겨울산에 합장 외 1편 최향란 시인 / 겨울산에 합장 수직이 아니어도 기어서 당당한 줄사철나무를 만나차가운 수직의 본능과신열에 부어올라 들리지 않았던 시간은 헛된 모래시계냐아직 물음 던지지 못한 눈 내리는 마이산 온 세상에 눈이 내리고 또 내리는데(1)의사지만 시인이고 싶은 지바고용납 못할 개인의 자유와얻을 수 없는 그녀를 껴안았던 시인의 얼음 별장하얀 눈은 세상의 끝에서 끝까지 휩쓰나니(2)눈 내리는 마이산에서 우리는 다시 흰 빛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은수사 마당에 깊게 홀린 겨울 꿈 헤치고 보니안과 밖에온 길과 갈 길에환히 보이는 그 곳에유치찬란이라 누락 시켰던 야윈 사랑 치욕으로 잊었던 자유가시인의 금지된 사랑이 온힘 다해 얼음산 기어서 오르는데거짓말처럼 다 순하다 줄기에서 뿌리 내려 또 시작하는 줄사철나무처럼완성은 아픈.. 2022. 9. 26.
이재연 시인 / 달의 은둔 외 1편 이재연 시인 / 달의 은둔 그렇습니다앞에 가는 사람은 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날이 어두워서무서워집니다 저편에서 했던 말이이편으로 들려오는 데에는밤이 제격입니다 밤이 맞습니다누구의 걸음인지 많이 걸어도저편에 가 닿지 않습니다이편에 와 닿을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아직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물론 저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쯤나도 무사히 집에 도착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밤의 세계는화덕의 불처럼 타오르다의식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참 이상한 날입니다눈에 보이지 않는 편지들이 하늘을 덮었습니다내일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어디선가 다시 만나야 하겠지만우리의 소멸은 남겨 둬야겠습니다주인이 말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집니다우리는 때때로 완전히.. 2022. 9. 26.
정세훈 시인 / 첫사랑 외 1편 정세훈 시인 / 첫사랑 녀석이 나보다부잣집 아들이었다는 것도학업을 많이 쌓았다는 것도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도그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았다 다만, 녀석이내 끝내 좋아한다는 그 말 한마디전해지 못했던 그녀와한 쌍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적 난 그만녀석이 참으로 부러워섦게 울어버렸다 정세훈 시인 / 단풍 들 때 나의 생이여 즐거운가 그렇다면 그 즐거움은단풍 들 때 동맥 끊듯 끊어지거라행여 도적같이 지나온 전생이었든혹여 찰나같이 닥쳐올 내세이든차마 하지 못하고, 못 할 사랑엉겁결에 저질러놓고행복에 겨워 있다면 그 행복 단풍 들 때가을 볕 수수 모가지 잘라지듯 잘라지거라천상의 고통이 지상으로 내려오고지상의 고통이 천상으로 올라가는그리하여 머지않아 발가벗겨질 온 천지가울긋불긋 울긋불긋 단풍 들 때나의 생이여 .. 2022. 9. 26.
박경리 시인 / 사람의 됨됨이 외 1편 박경리 시인 / 사람의 됨됨이 가난하다고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그것은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후함으로 하여삶이 풍성해지고인색함으로 하여삶이 궁색해 보이기도 하는데생명들은 어쨌거나서로 나누며 소통하게 돼 있다그렇게 아니하는 존재는길가에 굴러 있는한낱 돌멩이와 다를바 없다 나는 인색함으로 하여메마르고 보잘 것없는인생을 더러 보아왔다심성이 후하여넉넉하고 생기에 찬인생도 더러 보아왔다 인색함은 검약이 아니다후함은 낭비가 아니다인색한 사람은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후한 사람은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 사람 됨됨이에 따라사는 세상도 달라진다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보지만인색한 사람은 먹어도 늘 배가 고프다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 2022. 9. 26.
전영미 시인 / 전언 외 1편 전영미 시인 / 전언 무언가 잠시 반짝인다 찢겨진 너의 그림자안에서 그렇게 쉽게 뭉개지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네 안에서 눈 뜨고 있으니 어둠을 끌어다 덮고 있는 자여 그대로 잠깐 잠들어도 된다 너는 땡볕 아래서 너무 오래 떨었으니 빙하 속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던 자여 이제는 흘러가도 좋다 너는 네 시린 발을 기억하고 있으니 오랫동안 깨진 거울을 들여다보던 자여 서둘러 새 거울을 사야 한다 너는 네 얼굴을 안다고 오해하고 있으니 그렇게 쉽게 꺾이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또다시 연한 이파리들이 돋아나는 걸 보았으니 내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자여 결국은 네 스스로 기억해낼 것이다 너는 이미 내게 이 모든 걸 들려준 적 있으니 ㅡ『시인동네』(2019, 11월호) 전영미 시인 / 거기, 누구세요? 태어났을 때 난.. 2022.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