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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937

박목월 시인 /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외 4편 박목월 시인 /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 해외로 나간 친구의 체온이 느껴진다. 참으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골목길에는 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 동·서·남·북으로 틔어 있는 골목마다 수국색(水菊色) 공기가 술렁거리고 뜻하지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약간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 오늘. 어디서나 분홍빛 발을 아장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만나게 된다. ㅡ무슨 일을 하고 싶다. ㅡ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하고 싶다. ㅡ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 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오고 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 2021. 2. 13.
김현승 시인 / 행복의 얼굴 외 5편 김현승 시인 / 행복의 얼굴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김현승 시인 / 감사 감사는 곧 믿음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모른다. 감사는 반드시 얻은 후에 하지 않는다. 감사는 잃었을 때에도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사는 곧 사랑.. 2021. 2. 12.
김현승 시인 / 꿈을 생각하며 외 4편 김현승 시인 / 꿈을 생각하며 목적은 한꺼번에 오려면 오지만 꿈은 조금씩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한다. 목적은 산마루 위 바위와 같지만 꿈은 산마루 위의 구름과 같아 어디론가 날아가 빈 하늘이 되기도 한다. 목적이 연을 날리면 가지에도 걸리기 쉽만 꿈은 가지에 앉았다가도 더 높은 하늘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그러기에 목적엔 아름다운 담장을 두르지만 꿈의 세계엔 감옥이 없다. 이것은 뚜렷하고 저것은 아득하지만 목적의 산마루 어디엔가 다 오르면 이것은 가로막고 저것은 너를 부른다. 우리의 가는 길은 아 ㅡ 끝 없어 둥글고 둥글기만 하다. 김현승 시인 / 지각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2021. 2. 11.
이은상 시인 / 새 역사는 개선장군처럼 외 4편 이은상 시인 / 새 역사는 개선장군처럼 사랑의 큰 진리를 배반한 죄의 값으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조국과 아시아의 세계 멸망의 낭떠러지에서 발을 멈추고 새 역사를 기다리자 우리들의 새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순풍에 돛 달고 오는 유람선같이 오진 않으리 얼굴과 몸뚱이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로 오리라 우리들의 새 역사는 상처투성이지만 이기고 돌아오는 역전의 개선장군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리니 그 날에 우리는 그와 함께 분명 그와 함께 서리라 이은상 시인 / 스승과 제자 또 한 고개 높은 재 넘어 낭떠러지 길가에 앉아 고달픈 다리를 쉬노랄 제 뒤에서 돌격대처럼 달려와 '선생님'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껴안는 병정 한 사람 반가와라 이게 누군고 군인이 된 나의 제자 길목 지키는 파수병으로 이 깊은 산협.. 2020. 6. 9.
이은상 시인 / 갈림길에서 외 4편 이은상 시인 / 갈림길에서 체온도 지탱하기 어려운 이 음산한 고난의 땅 역사의 실패한 땅에서 일어서야 할 민족이기에 한 가닥 희망의 길을 찾아 우리 갈 길을 가야 한다 인류의 역사 위에 수많은 의인들이 걸어간 거룩한 피와 눈물이 밴 진리와 아름다움의 길 그 길이 너무도 또렷이 우리 앞에 놓여 있구나 눈물과 땀과 피는 인간이 가진 세 가지 재산 기원과 봉사와 희생 거기 영생의 길이 있네 험하고 가파로와도 오직 그 길만이 사는 길! 너와 나, 식어져버린 가슴 속의 사랑의 피 그 피 다시 끓이면 거기 화사한 장미꽃 피고 눈부신 부활과 영광의 길 우리 앞에 열리리라 이은상 시인 / 강둑에 주저앉아 문득 보니 미국 병정 총 들고 길 앞을 막네 미군의 담당구역이라 통행증을 보이라 하네 남한 쪽 분계선 안에서마저 자.. 2020. 6. 8.
이육사 시인 / 산 외 1편 이육사 시인 / 산 바다가 수건을 날여 부르고 난 단숨에 뛰여 달여서 왔겠죠 천금(千金)같이 무거운 엄마의 사랑을 헛된 항도(航圖)에 역겨 보낸날 그래도 어진 태양(太陽)과 밤이면 뭇별들이 발아래 깃드려 오고 그나마 나라나라를 흘러 다니는 뱃사람들 부르는 망향가(望鄕歌) 그야 창자.. 2020. 4. 26.
정지용 시인 / 바다 9 정지용 시인 / 바다 9 바다는 뿔뿔이 달어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었다. 힌 발톱에 찢긴 珊瑚(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루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 이 앨쓴 海圖(해도)에 손을 싯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2020. 4. 16.
이상 시인 / 易斷ㅡ家庭 외 1편 이상 시인 / 역단(易斷)ㅡ가정(家庭) 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나는우리집내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食口야封한창호窓戶에더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收.. 2020. 4. 16.
윤곤강 시인 / 엘레지(ELEGIE) 윤곤강 시인 / 엘레지(ELEGIE) 안개처럼 가라앉은 마음의 변두리에 악마가 푸른 눈초리로 슬며시 엿보는 밤 죽지 않는 정열의 풍차가 저절로 미쳐서 빙빙 돌다가 제풀에 지쳐 주저앉은 시간이다 송장처럼 다문 입술 위에 까마귀처럼 떠도는 벙어리 침묵이 가없는 밤의 '캠버스' 위에다 자줏.. 2020. 4. 16.
박재삼 시인 / 천년의 바람 외 3편 박재삼 시인 / 천년의 바람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 2020. 3. 25.
박재삼 시인 / 신록(新綠) 외 4편 박재삼 시인 / 신록(新綠) 봉사 기름값 대기로 세상을 살아오다가 저 미풍微風 앞에서 또한 햇살 앞에서 잎잎이 튀는 푸른 물방울에 문득 이 눈이 열려 결국 형편없는 지랄과 아름다운 사랑이 한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촌끼리임을 보아내노니, 박재삼 시인 / 신록(新綠)을 보며 나는 .. 2020. 3. 24.
박재삼 시인 / 바람의 내력 외 4편 박재삼 시인 / 바람의 내력 천 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가락으로 불어 변한 데라곤 없네 언뜻 느끼기에는 가난한 우리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머물던 바람이 다른 듯 하지만 결국은 똑같네 잘 살펴보게나 안 그렇던가 세상 돌아.. 2020. 3.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