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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937

문병란 시인 / 직녀(織女)에게 외 2편 문병란 시인 / 직녀(織女)에게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번이고 감고 .. 2020. 3. 7.
피천득 시인 / 1930년 상해(上海) 외 2편 피천득 시인 / 1930년 상해(上海) 겨울날 아침에 입었던 꽈쓰*를 전당잡혀 따빙[大餠]*을 사 먹는 쿠리[苦力]가 있다 알라 뚱시[東西]* 치롱 속에 넝마같이 팔려 버릴 어린 아이가 둘 한 아이가 둘 한 아이가 나를 보고 웃는다 * 꽈스: 중국옷 상의(上衣) ** 따빙[大餠]: 호떡 ** 알라 뚱시[東西]: .. 2020. 3. 6.
문병란 시인 / 정당성 2 외 1편 문병란 시인 / 정당성 2 때때로 나의 주먹은 때릴 곳을 찾는다. 그 어느 허공이든가 그 어느 바위 모서리이든가, 주먹은 때릴 곳을 찾아 고독하다. 뻔뻔한 이마, 오만한 콧날을 향하여 꼭 쥐어진 단단한 주먹. 응집된 핏덩일 물고 사각의 쟝글 속에 불꽃을 튀기는 일순, 산산히 부서져가는 .. 2020. 3. 6.
문병란 시인 / 유행가조(流行歌調) 1 외 2편 문병란 시인 / 유행가조(流行歌調) 1 부로크 담길 돌아서 돌아서 내 고향 팽나무 서 있는 곳에 새마을 사업 지나간 다음 심심하게 서 있는 말뚝만 남았고 장다리꽃 핀 밭두렁 가에서 처녀를 빼앗긴 순이가 보따리를 싸는데 어이할거나 꾀꼬리 암수놈 흥이 나서 미친 대낮 자지러지는데 모.. 2020. 3. 5.
황명 시인 / 푸른 아침에 외 2편 황명 시인 / 푸른 아침에 이 푸른 아침에 내 창가에 날개를 조아리는 새 한 마리 있어 가만히 창을 열었더니 느닷없이 내 방, 그 눈부신 고독 속으로 분간도 모르고 들어온다. 시끄러운 세상보다는 숫제 내 고향 같은 아늑한 곳에 가서 책이나 읽고 싶은 마음으로 이렇게 찾아든 것일까 이 .. 2020. 3. 5.
문병란 시인 / 시인(詩人)의 간(肝) 외 1편 문병란 시인 / 시인(詩人)의 간(肝) 독수리가 파먹다 남은 프로메테우스의 간, 용궁의 도마 위에 올려놓은 한점 토끼의 간, 빛나는 식칼은 목마르다. 어쩌다 쇠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의 모진 형벌, 천번 죽는 사나이가 모질게 최후의 간을 지키고 있다. 제 꾀에 속아 용궁 제3별관에 감.. 2020. 3. 4.
황명 시인 / 안경을 닦으며 외 2편 황명 시인 / 안경을 닦으며 오늘은 아침부터 시야(視野)가 흐리다. 흐린 시야(視野)를 회복할 양으로 안경을 닦는다. 아무 소용이 없다. 실은 안경이 흐린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온통 먼지투성인 것을 새삼 깨닫는 지명(知命)의 아침이여. 내 어릴 적 제천 어느 두메에서 만난 사슴의 해맑은 .. 2020. 3. 4.
문병란 시인 / 법성포 여자 외 1편 문병란 시인 / 법성포 여자 마이가리에 묶여서 인생을 마이가리로 사는 여자 주막집 목로판에 새겨온 이력서는 그래도 화려한 추억 항구마다 두고 온 미련이 있어 바다 갈매기만도 못한 팔자에 부질없는 맹세만 빈 보따리로 남았구나. 우리 님 속 울린 빈 소주병만 쌓여 가고 만선 소식 .. 2020. 3. 3.
황명 시인 / 시장(市場)에 서면 외 2편 황명 시인 / 시장(市場)에 서면 거울을 파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 저 하늘 같은 거울을 팔고 싶어라 여기 시장에 서면 나는, 먼 원시의 동혈(洞穴) 속 포효(咆哮)를 닮은 군상(群像)들의 표정은 가파른 천길 낭떠러지를 굽어 보고 비로소 살아야겠다는 숨찬 결의의 서슬찬 그 우러름이 정녕 .. 2020. 3. 3.
문병란 시인 / 돌멩이 외 1편 문병란 시인 / 돌멩이 반들반들하고 이쁜 돌멩이 하나 내 품에 감추었어라 심심할 땐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급할 땐 미운 놈 이마빡도 까주게 나는 돌멩이 하나 남몰래 감추었어라 아 애증(愛憎)의 산하(山河) 내 주먹을 어디다 둘꼬?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문병란 시인 / 땅의 연가(.. 2020. 3. 2.
황명 시인 / 상황(狀況)Ⅰ 외 2편 황명 시인 / 상황(狀況)Ⅰ 아득한 날에 말이 있었고 아득한 날에 흐름은 있었다지만 사람이 그리워하는 것은 아예 하늘도 땅도 해도 달도 아닌 스스로의 눈과 입과 그리고 귀가 달린 머리와 그리고 둑이 없는 질펀한 자유(自由) 그래서 얼마든지 출렁여도 좋을 서로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 2020. 3. 2.
문병란 시인 / 꽃씨 외 2편 문병란 시인 / 꽃씨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 2020. 3. 1.